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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학계 등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이들의 발자취

역사 한 스푼

청빈한 삶 속에 빛난 인류애

외과의사 장기려 박사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외과의사인 장기려 박사에게는 ‘바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바보’는 지적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라고 해 요즘은 많이 쓰지 않지만, 예전에는 ‘어리석은 사람’, ‘멍청한 사람’을 일컫는 대표적인 말이었지요. 의학박사 학위까지 가진 그에게 왜 ‘어리석다’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그의 헌신적인 삶을 되짚어 보면 이런 별명이 납득이 됩니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장기려 박사의 삶을 돌아봅니다.

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성산장기려기념사업회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어람용 의궤
▲ 장기려 박사의 가족사진(윗줄 오른쪽이 장기려 박사, 아기를 안고 계신 분이 북에 두고 온 아내)
어람용 의궤
▲ 장기려 박사의 가족사진(윗줄 오른쪽이 장기려 박사, 아기를 안고 계신 분이 북에 두고 온 아내)
‘바보’라 불린 성자(聖子)

장기려 박사는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집 한 채 없이 청빈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않고 남을 돕는 데만 전념했기에 붙은 별명 ‘바보’. 그러나 이 별명은 결코 비하나 멸시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헌신과 희생, 깊은 인류애를 완벽하게 실천한 그의 삶에 대한 극찬과 존경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살아 있는 성자’라고도 불렸는데, 정말 성자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1911년 한반도에서 일제강점기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 박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체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장기려 박사는, 경성의전 입학 때 ‘가난하고 헐벗은 불쌍한 환자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라고 신 앞에 서약했습니다. 1932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그는 경성의전 부속병원을 거쳐 1940년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그때도 수술비나 수혈받을 돈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혈액을 사주거나 무료로 수술을 해주곤 했습니다.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라는 다짐을 그는 이미 젊은 의사 시절부터 실천했던 것이지요.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장기려 박사는 북한 평양도립병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그는 종교를 부정하고 탄압하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태도와 의사로서의 뛰어난 실력은 이념의 벽을 넘어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어람용 의궤
▲ 복음병원 원장 시절
어람용 의궤
▲ 복음병원 원장 시절
직지심체요절
▲ 젊은 장기려 박사
직지심체요절
▲ 젊은 장기려 박사
어려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봉사 열정

장기려 박사가 김일성의과대학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 초기, 그는 평양의 병원에서 몸에 폭탄 파편이 박힌 환자를 하루에 50명 가까이 수술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 진주하자 그는 평양에 임시로 만들어진 국군야전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해 말, 중공군의 참전으로 아군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장기려 박사는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차남을 제외한 네 명의 자녀와 아내는 탈출에 실패해 북한에 남게 되었고, 결국 이산가족이 되었지요. 장기려 박사는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북에 남은 가족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가족과 헤어지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지만, 가난한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사명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온 전영찬과 뜻을 모아 교회의 도움으로 가난한 환자를 위해 복음진료소라는 무료 진료소를 세웠습니다. 훗날 복음병원이 되는 이 진료소에서 장기려 박사는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성심껏 진료해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기적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무료 진료를 계속하다 보니 복음병원의 경영이 어려워졌고, 장기려 박사는 원장이지만 어떤 환자를 무료로 진료할 것인지를 혼자 결정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환자들이 찾아와 입원비나 수술비가 없다고 사정하면 자신의 월급을 털어서 치료하고 퇴원까지 시켰습니다. 그렇게 월급마저도 다 써버린 그는 오랫동안 입원해 있던 환자가 돈이 없어서 퇴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정을 듣고는 병원 직원들 몰래 뒷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길거리에 버려져 제 발로는 병원을 찾아오지도 못하는 행려병자들을 직접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병원 경영진을 당황하게 만든 일도 자주 일어났던 것이지요.

어람용 의궤
▲ 천막병원 의료진
어람용 의궤
▲ 천막병원 의료진
직지심체요절
▲ 천막 진료 현장 모습
직지심체요절
▲ 천막 진료 현장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장기려 박사는 환자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습니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 났을 때 도움받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된 이 조합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이었지요. 또 장기려 박사는 뇌전증 환자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 같은 해 뇌전증 환자들의 모임을 만들어 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1976년에는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해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돕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 의대 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던 장기려 박사는 그 기간에도 복음병원에서 영세민을 진료하는 등 의료 봉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 의학계 발전을 위해 장기려 박사가 이룬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그의 업적과 활동을 치하하는 수많은 상과 훈장이 주어졌지만 그는 그 상금도 기부할 정도로 그의 머릿속은 온통 봉사와 헌신이 가득했습니다.
1985년, 정부는 그에게 북한에 있는 가족을 우선적으로 만나게 해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 특혜를 받을 수 없다며 그 기회를 포기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85세까지 환자를 치료했고, 80세가 넘도록 자신이 20년 전에 저술한 교과서의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20여 평에 불과한 복음병원 옥탑방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죽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환자를 위해, 후진 양성을 위해, 우리나라 의학과 의료복지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장기려 박사는 1995년 크리스마스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발자취는 우리나라 의학 분야, 의료복지 분야, 사회사업 분야 구석구석에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의 헌신과 희생, 인류애는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져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케이 로고 이미지

어람용 의궤
▲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
어람용 의궤
▲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
직지심체요절
▲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Magsaysay Award) 수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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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Magsaysay Award) 수상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