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l 영상 이철민
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l 영상 이철민
지금까지 한국이 선진국을 추격하는 과정은 성공적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이처럼
빠른 속도로 달성한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유일하다. 이제는 누군가 앞서간 길이라는 참고 자료
없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이정동 교수는 이를 위해 기존 관행을 벗어나는 ‘탈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게나 바닷가재가 탈피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움직임도 거의 없죠.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나고 나면 한 단계 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과거 이정동 교수는 ‘축적의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혁신의 화두를 제시했다. 이를 주제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자 26명과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어 대중과 공유하기도 했다.
추격의 정점에 오른 지금, 한국은 새로운 혁신을 추진해야 하는 과제 앞에 있다. 경제 규모로는
이미 선진국이지만 혁신의 토대가 되는 ‘기술’ 측면을 비교하면 여전히 선진국과의 격차는 크다.
“‘축적의 시간’이라는 화두에서 강조한 것은 독창적인 개념 설계였습니다. 독창적 개념 설계를
할 수 있는 역량은 도전적 시행착오를 꾸준히 축적해야만 나온다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그런데 시행착오의 축적을 거쳐 발전하려면 그보다 앞서 도전적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최초의 질문’은 도전적 시행착오를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최초의 질문’은
‘축적의 시간’의 프리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리퀄: 선행하는 사건을 담은 속편
이정동 교수는 혁신의 씨앗이 되는 최초의 질문을 ‘기존 분야의 모범과는 다른 규범을 제시하는, 비전이
담긴 질문’으로 정의한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질문은 아직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에
대한 해법이 완전한 새것일 필요는 없다. 기존 기술을 다양하게 ‘조합’하는 것으로도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 그런 조합이 하나에서 둘, 셋으로 늘어나면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할 기술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기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것은 왜 안 될까? 지금까지 해 본 사람은 없지만 내가 한번 해보고 싶은데?’라는 도전적인 문제 제기가 바로 최초의 질문입니다.
조금 크게 보면 자신이 바라는 세상에 대한 비전이라
할 수 있어요. 기술도 알고 보면 각자 소망하는 비전과 꿈, 희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대의 변곡점에는 최초의 질문을 던져온 비전 제시자(Visionary Leader)가 있었다. 이정동 교수는 한
사례로 인터넷을 꼽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터넷은 ‘컴퓨터와 컴퓨터가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라는 최초의 질문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가장 뜨거운 쟁점인 생성형 AI 역시 마찬가지다.
“1950년대에 ‘컴퓨터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연구개발 결과로 오늘날 생성형
AI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 결과 산업계의 가치사슬이** 전면 개편되면서 사람들이 소통하고 일하는 방식도
바뀌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창의성이나 지능의 고유성에 대한 질문은 물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질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다. 이정동 교수는 더 나은 변화를 이끄는 질문의
원리를 진화론에 빗대어 ‘변이-선택-전승’으로 설명했다.
“진화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변이와 선택, 전승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새로운 종이 탄생하죠.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초의 질문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관점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마침내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진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대안적 시도가 채택되지 못한 채 실패로
판정받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이를 건강한 피드백으로 생각하면서 개선해 나가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가치사슬: 기업 활동에서 부가 가치 창출에 관련된 모든 활동의 연계
아직 한국에서는 ‘튀는’ 시도가 환영받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하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다 보면 시대의 변화 속도에 밀려 뒤처질 수도 있다.
“그동안 한국은 주어진 매뉴얼에 의문을 품기보다 빠르게 수용하고 수행하는 것으로 성공해 왔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교과서나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일단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도전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도전은 시행착오의 위험 때문에 개인이 모두 책임지기
어렵습니다. 시행착오의 위험을 덜어줄 수 있는 국가적 지원도 필요하고, 그 과정을 격려하는 사회 분위기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서울대학교 역시 교육기관 중 하나로서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공학전문대학원과 대학원 협동
과정인 기술경영경제정책 전공 역시 다음 시대의 교육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해법이다.
“융합의 시대에 분과적 시각으로 학문에 접근할 것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공학적으로 풀어 나가보자는 관점에서
공학전문대학원이라는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술경영경제정책 전공은 대학원 단계에서 이공계의 지식과
경영·경제 정책의 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비롯했습니다.”
지난해에는 ‘SNU 그랜드 퀘스트 오픈 포럼’을 열고 과학기술의 미래를 향한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집적회로 기술로 양자컴퓨팅을 구할 수 있을까?’, ‘인과 관계를 완전히 추론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을까?’ 등 10개 질문을 두고 주제별로 각 분야 석학 2인이 발표자로 나서 청중과 함께 토론을 펼쳤다.
현장에서 오가는 다양한 질문은 새로운 발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는 대학원생도 여럿 참여했는데 토론 시간에 나오는 학생들의 질문을 보고 ‘한국에도 질문에 대한
잠재력은 넘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도 수업을 할 때면 사전에 학생들에게 자료를 나눠주고 질문지를
써내도록 하는데요, 나중에 질문지를 모아놓고 보면 날카로운 시선과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는 질문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만약 현장에서 질문할 사람을 즉흥적으로 찾았다면 그런 질문은 만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학생들은 질문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질문하는 법조차 한 가지 방식을 고수해 온 것은 아닐까. ‘질문 잘하는 학생’의 기준을 질문의 양이나 종류로
규정하지 않고, 우리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 학생들이 질문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알고 보면 모든 사람에겐 질문의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