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l 영상 김수
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l 영상 김수
2017년 3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은 ‘교육 개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6년 알파고의
등장은 산업계는 물론 학계와 교육계에도 파장을 일으켰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예측과 토론이 수시로 일어났다. 교육 방식은 물론 인재
육성 목표에도 대대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도 모였다.
유재준 교수는 당시 자연과학대학에서 추진한 교육 개혁 프로젝트의 총괄을 맡아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오간 논의는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부상한 지금 더 유효해졌다.
“그즈음 내부적으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어떤 인재로 성장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습니다. 교수의 강의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외우는 학습 방법이 대학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도 있었고요. 빠른 모방자(Fast Follower)로 성장한 한국이 새로운
동력을 찾아 선도자(First Mover)로 나아가려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교육 개혁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프로젝트에는 유재준 교수를 비롯해 13명의 자연과학대학 교수가 참여했다.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는 ‘질문하는 법’을 기르는 데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교수들은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한 학생들이 ‘질문 찾기’에 주력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과 소통하고 질문을 끌어냈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던 때, 유재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정답은 AI가 찾으면 된다.
인간에게는 정답을 찾는 능력 대신 ‘문제를 찾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다. 새로운 논제를
발견하려면 끊임없이 다각도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라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유재준 교수가 다른 보직을 맡으면서 총괄 책임자가 바뀌었지만, 당시 프로젝트의
취지를 살린 교육 개혁은 자연과학대학 안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얼핏 과학을 잘하려면 정답을 잘 구해야 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오히려 과학은 문제를 찾고
만들어내는 학문입니다. 서울대학교 역시 과거 줄 세우기식 입시에서 벗어나 다양한 배경과
역량을 지닌 학생들이 들어옵니다. 이러한 다양성 안에서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이어가려면
기존 교육 방식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본고사 마지막 세대인 유재준 교수도 학창 시절에는 ‘질문왕’으로 통했다. 수업 시간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데도 그를 나무라는 선생은 없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답을
찾으려 애쓴 스승들의 모습을 통해 더 큰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과학계에서도 반복되는 질문을 통해
발전을 이루어낸 사례가 많다. 지금은 ‘지구가 돈다’라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 질문했기 때문에 밝혀낼 수 있었던 진실이다.
“질문은 학습에 임하는 학생의 태도를 능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질문 없는 강의실은 생명력을
잃은 강의실처럼 여겨져요. 중고등학교 때 질문하지 않는 습관이 든 학생들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질문하고 답을 얻는 시간을 아깝게 여기는 시선도 있고요. 하지만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학습하는 습관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나오는 질문은 단순히 한 학생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질문함으로써 그 자리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지적 자극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지식이 각인되는
효과도 생긴다.
“최근 교육과 관련해 자주 논의하는 화두는 ‘언러닝(Unlearning)’입니다. 학습을 뜻하는 ‘러닝(learning)’에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사 ‘언(un)’을 더한 말이죠. 쉽게 말하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문제를 다시
뒤집어보는 겁니다. 모든 수업에 이런 방식을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3시간짜리 대학 강의라면 초반
10~20분쯤 이런 실험을 해볼 수 있겠죠.”
그 역시 단순 암기 형식이 아닌 생생한 과학 지식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교육 방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수업을 할 때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기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필요하다면 온라인에 자료를 미리 공유하고 학생들도 질문과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다만 유재준 교수는 질문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암기를 통해 익히는 지식의 중요성이
간과되는 것은 경계했다.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교육은 ‘암기식’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암기해 익히는 지식 교육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암기해 얻은 지식과 암기한 것을 바탕으로 질문을 던져 얻은 지식은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두 가지 지식 습득 방식을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암기는 나쁘다’고만 합니다.
예를 들어, 고기 잡는 법을 배우는 방식은 다양한데 개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해 보며 경험으로
알아가기보다 ‘고기 잡는 매뉴얼’을 외우게 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의 핵심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학생 스스로 지적 호기심을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2022년 6월부터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장을 맡아 기초 과학 발전과 함께 인재 양성의
책임을 맡고 있는 유재준 교수의 요즘 고민은 ‘교육’과 ‘연구’의 균형 맞추기다. 이를 위해 그는
자연과학대학 교수들이 높은 수준의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면서 학생들이
역량을 키우고 자질을 강화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20, 30년
전과 비교하면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의 위상이나 역량은 사뭇 달라졌다. 하지만 시스템
차원에서의 혁신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을 졸업한 허준이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가 한국계 수학자 최초로
2022년 필즈상을 받았을 때 일부는 한국 교육의 경사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일부는 자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미디어에서 알려진 대로 허준이 교수는 학부 시절까지
진로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서울대학교의 ‘노벨상급 석학 유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온
필즈상 수상자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를 만나면서 수학에 대한 영감을 얻고 서울대학교
수리과학부 대학원에 진학해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재준 교수는 허준이 교수의 사례가 “학생에게 무엇을 제공해야만 그들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을지 보여주는 예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라고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하고 전공을 정하는 한 번의 선택이 인생 전체를 좌우하기보다 좀 더 유연하게
앞날을 그려나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질문은 학생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유재준 교수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생각하며 또 다른 질문을 찾아가고 있다.
질문은 학생의 학습태도를 능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질문 없는 강의실은 생명력을 잃은 강의실입니다. 우리나라가 다시 도약하려면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학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