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은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손꼽힌다. 우리는 지구를 위해 쓰지 말아야 할 비닐을 얼마나 쓰고
있을까. 그린피스의 보고서 「2023 플라스틱 대한민국 2.0」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인 1인당
비닐봉지 연간 소비량은 10.7kg이다. 재활용률이 낮을뿐더러 잘 썩지도 않고, 소각하면 유해
물질이 발생하는 골칫덩어리 비닐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 사람이 있다. 업사이클링 브랜드
‘희(H22)’의 장우희 대표다. 버려진 비닐로 다양한 패션 소품을 만드는 장우희 대표를 만났다.
글 박지연 l 사진 성민하
버려진 비닐봉지로 만든 다양한 패션 소품
“비닐봉지를 발명한 사람은 스웨덴 공학자 스텐 구스타프 툴린(Sten Gustaf Thulin)이에요. 1960년대만 해도
상품을 포장하고 운반하는 데 흔히 종이봉투를 사용했는데, 쉽게 낡고 찢어져 재사용이 어려운 데다 계속해서
나무를 베어야 만들 수 있는 단점이 있었죠. 이를 안타까워한 툴린은 가볍고 튼튼하며 방수 기능까지 갖추고
여러 번 사용 가능한 가방을 발명했어요. 바로 오늘날 흔히 쓰는 비닐봉지입니다. 툴린은 내구성이 뛰어난
비닐봉지가 일회용이 아니라 다회용으로 쓰일 것이라고 믿었죠.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비닐봉지는 한 번
사용하고 버려지는 대표적인 쓰레기로 지금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툴린이 살아 있다면 자신이
발명한 비닐봉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지구환경을 오염시키는 천덕꾸러기가 된 비닐봉지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희(H22) 장우희 대표의 말이다.
장우희 대표는 버려진 비닐봉지로 다양한 패션 소품을 만든다. 작업실이자 사무실 한쪽에는
각양각색의 비닐봉지가 가득하다. 주로 지인이나 친구들이 보내준다.
사무실 한편에는 장우희 대표의 작품인 검은색 가방 하나가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엔
가죽 가방이라고 해도 될 정도지만 마트에서 흔히 쓰는 검정 비닐봉지로 만들었다.
“가죽 느낌이 나는 것은 비닐을 열로 압축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결 때문이에요. 비닐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데다 경량성과 내수성이 뛰어나고 다양한 색상이나 질감 표현이
가능해 가방이나 파우치부터 다양한 패션 소품까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어요.”
열 압축 기법으로 재탄생한 비닐 소재
버려진 비닐봉지를 어떻게 예쁜 패션 소품으로 재탄생시킬까.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슴이 설렌다.
장우희 대표는 비닐봉지 몇 장을 가지고 오더니 직접 시현을 했다.
“작은 명함 지갑을 만들어 볼게요. 마음에 드는 비닐봉지를 반듯하게 편 다음 네댓 장을 겹쳐 열
압축기에 넣어 압축합니다. 열과 압력으로 가공하는 열 압축 기법(Heat-Bonded Technique)을
적용하는 건데요, 열 압축을 할 때는 종이 포일을 깔아줘야 눌어붙지 않아요.
집에서는 다리미를 사용하면 됩니다.”
열 압축기에 비닐봉지를 넣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각각의 비닐봉지가 서로 하나가 되어 새로운 소재가
되었다. 열을 가하는데도 유해가스나 불쾌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은 비닐 소재가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이기 때문이다.
“비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비닐은 환경호르몬이나 유해가스가
나오지 않아요. 이는 아이들 젖병이나 전자레인지용 용기에 쓰는 소재이기도 해요. 과자나 라면 등 포장
내부에 은박 비닐이 있는 것은 열 압축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여러 가지 플라스틱을 혼합해 만든
비닐봉지라 환경호르몬이나 유독가스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보통 마트 비닐봉지나 종량제 봉투,
뽁뽁이, 택배 비닐봉지가 좋아요.”
열 압축기를 거쳐 재탄생한 새로운 비닐 소재는 준비된 도안을 따라 재단한 뒤 접거나 재봉한다. 예쁜 버튼을
달고 나니 10여 분 만에 예쁜 명함 지갑이 탄생했다. 열에 의해 나타난 고유한 주름 패턴이 특이한데, 외부
충격에도 잘 손상되지 않을뿐더러 제품에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더한다.
“만드는 방법이 쉽고 간단해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작품을 만들기에 좋아요. 실제로 초등학교에서
강의도 하는데, 아이들 반응이 정말 좋습니다. 버리면 지구환경을 위협하는 쓰레기가 되지만, 잘 모아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는 다양한 소품으로 재탄생시키면 오래도록 쓸모 있는 제품이 됩니다. 비닐의 재발견이죠.”
가방 등 비교적 큰 제품을 만들 때는 재봉을 해야 하는데 소재가 딱딱한 편이라 재봉질이 다소 까다롭다.
그러나 이런 단점은 비닐이 가진 다양한 장점으로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는다.
천덕꾸러기 비닐을 지속 가능한 소재로 바라보다
장우희 대표가 비닐이라는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우연이었다. 섬유공예를 전공한 장우희 대표는 대학원
연구 주제를 고민하다 비닐에 주목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해외여행을 다니며 각 나라에서 다양하고
특색 있는 비닐봉지를 접하면서 비닐을 주 소재로 쓰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죠. 비닐에 주목하고 공부하다 보니
환경오염 문제까지 관심이 확장되었어요. 태평양에는 한반도 면적의 7배에 달하는 플라스틱 섬이 있다고
합니다. 버려진 비닐봉지를 새로운 소재로 재탄생시켜 실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제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환경을 보호하는 일이 아닐까 싶었죠.”
실제로 비닐은 몇백 년 동안이나 썩지 않고, 연소 시 유해물질을 발생시켜 심각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는 비닐 사용을 제한하는 제도와 법안을 추진·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우희 대표는 비닐을 새로운 소재로 재탄생시키기까지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듭했다고 말한다. 지금이야
열 압축기를 이용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가정용 다리미로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다. 적당한 온도를 찾지 못해
비닐이 다리미에 눌어붙어 난감한 적도 수없이 많았다.
“비닐은 다양한 소재적 강점이 있지만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부각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각을
전환해 비닐을 지속 가능한 소재로 바라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툴린이 비닐봉지를 발명한 좋은 의도처럼 말이죠.
희(H22)가 지속적인 실험과 고민을 통해 패션 액세서리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을 거쳐 그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최근 장우희 대표는 비닐로 만든 조명을 구상하고 있으며, 기업들과의 협업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정을 쏟고 있는 장우희 대표는 개인적으로 환경을 위해 어떤 실천을 하고 있을까.
“뭘 사든 오래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물건을 살 때 고민을 많이 합니다. 버려진 비닐로 만든 희(H22)의
제품도 얼마 쓰지 않고 버리면 결국 또 쓰레기가 되어버립니다. 작은 물건이라도 한번 사면 오래도록 쓰는
것이야말로 쓰레기를 줄이고 지구환경을 지키는 실천 방법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