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과 발전에 이바지한 이상화 선생과 그의 형제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시를 쓰고, 3·1운동 등의 독립운동을 펼치며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인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교육자였던 이상화 선생은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는 대구에서도 알아주는 큰 부호이면서 선각자로 많은 이에게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이상화 선생이 일곱 살 때 생을 마감했지만, 큰아버지인 이일우의 보살핌으로 그를 비롯한 4형제가 모두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상화 선생의 형제들
형제 중 첫째 이상정(1897~1947)은 시서화(詩書畫)에 모두 능통했고 「표박기」라는 제목의 유고를 남긴 시인이자,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대표이자, 태평양전쟁 이후 중국 육군 중장으로 일제 북지나방면군
* 을 무장 해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난징 국민정부 항공서 비행사이자 의열단 여자부 연락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기옥이다. 셋째 이상백(1904 ~1966)은 광복 이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한국사회학회장 등을 역임하며
체육과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고, 넷째 이상오(1905~1969)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렵인으로 「한국야생동물기」와 「수렵야화」를 신문에 연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음에도 4형제 모두가 뛰어난 재주를 바탕으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4형제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은 이상화 선생이라 할 수 있다.
* 북지나방면군(北支那方面軍)은 중·일전쟁에 참가해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화베이 지역에서 작전 활동을 펼치던 일제 육군의 방면군(전략·전술상으로 중요한 방향이나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부대)이다.
독립에 대한 열망과 신념으로 시작된 활동
이상화 선생을 대표하는 문학작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나라의 독립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비참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또 이 시를 읽은 사람들은 먹먹함과 동시에 가슴 한편이 아팠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조차 작가가 시를 통해 어떤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느낄 정도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일제의 탄압을 이토록 강하게 거부하며 독립된 나라를 희망하는 시를 썼을까?
이상화 선생은 열네 살 때까지 큰아버지가 세운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한학(중국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하지만 한학만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을 살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년 동안 초등학교 과정을 익힌 뒤 서울 경성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학문을 처음 접했음에도 정규 교육과정을 어렵지 않게 따라갔다. 그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친 그는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며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고심했다. 그는 적극적인 실천 방법을 찾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백기만·허범 등과 함께 선전문을 시민에게 배포하며 대구 지역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일제 경찰이 그의 활동을 눈치채고 체포하려 했으나, 다행히 서울로 피신하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서순애와 혼인을 하였다. 그가 서울로 피신한 뒤 혼인한 이유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큰형 이상정을 대신해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한편 나라에 대한 사랑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다.
1916년, 민족정신이 싹튼 청소년기의 이상화 선생 [출처: 이상화 기념사업회]
민족의 봄날을 꿈꾼 저항시인으로 등단하다
이상화 선생을 대표하는 문학작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나라의 독립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비참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또 이 시를 읽은 사람들은 먹먹함과 동시에 가슴 한편이 아팠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조차 작가가 시를 통해 어떤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느낄 정도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일제의 탄압을 이토록 강하게 거부하며 독립된 나라를 희망하는 시를 썼을까?
이상화 선생은 열네 살 때까지 큰아버지가 세운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한학(중국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하지만 한학만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을 살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년 동안 초등학교 과정을 익힌 뒤 서울 경성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학문을 처음 접했음에도 정규 교육과정을 어렵지 않게 따라갔다. 그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친 그는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며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고심했다. 그는 적극적인 실천 방법을 찾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백기만·허범 등과 함께 선전문을 시민에게 배포하며 대구 지역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일제 경찰이 그의 활동을 눈치채고 체포하려 했으나, 다행히 서울로 피신하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서순애와 혼인을 하였다. 그가 서울로 피신한 뒤 혼인한 이유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큰형 이상정을 대신해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한편 나라에 대한 사랑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다.
가족사진. 이상화 선생(좌), 그의 옆 충희, 그의 맏아들 용희(맨 뒤),
태희, 그리고 부인 서순애, 처제
[출처: 이상화 기념사업회]
이상화 선생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게 됐고, 글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다짐하며 행동에 옮겼다.
첫 행보는 일본 도쿄에 있는 외국어 전문학교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1922년 창간하여 한국 근대 문학의 서막을 연 문예동인지 『백조』의 동인이 되어 「나의 침실로」, 「단조」 등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백조』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고자 박종화, 나도향 등이 주축이 되어 아펜젤러 등 외국인을 편집인으로 두었기에, 이상화 선생은 일제로 인한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면서 독립을 희망하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본 유학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꾸려 재일 한국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에서 울분과 희망이 섞인 시를 썼다.
그러면서 김기진과 함께 무산계급* 문예 운동 단체 ‘파스큘라’를 결성했다. 1925년에는 이를 더욱 발전시킨 ‘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의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향으로 유입된 만큼 그는 KAPF를 통해 독립과 함께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 의지를 담은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절실하고 소박한 감정으로 담은 시다.
생할 때 시민 중 일부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 조직을 참칭하며 구성하는 자발적 결사체를 말한다.
* 무산계급(無産階級):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뜻함.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의 삶
일제 경찰은 이상화 선생의 활동을 예의 주시했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차용·장원택 등이 대구 달성군 부호를 권총으로 협박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빌미 삼아 일제 경찰은 당시 최대 항일사회운동 단체였던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직을 맡고 있던 이상화 선생을 관련자라는 혐의로 구금했다. 이 사건을 ‘ㄱ당 사건’이라 부른다.
일제가 이상화 선생을 주요 사찰 대상자로 분류했음을 보여주는 일은 1936년에도 일어났다.
그가 여행을 가장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맏형 이상정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일제 경찰은 아무 혐의도 밝히지 않고 20여 일간 가두고 고문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39년에는 그가 교사로 근무하며 작사했던 대구교남학교(現 대륜중·고등학교) 교가의 가사를 문제 삼아 그의 집을 무단 수색해 그동안 집필한 원고와 그의 친구였던 시인 고월(古月)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했다.
여기에는 이상화 선생이 교남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길러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의 선입견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상화 선생이 작사한 교남학교 교가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상화 선생은 일본군에 의해 집을 무단 수색 당하기도 했다.
[출처: 교남학교 홈페이지]
1933년부터 이상화 선생은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무보수로 가르치면서 일본 유학 시절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권투부를 만들었다. 대구 복싱 역사의 첫 시작이기도 한 교남학교 복싱부를 찾은 학생에게 그는 “침략당한 민족이 주먹이라도 강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열심히 지도한 결과 아마추어 권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교남학교는 일제 경축일에 거짓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등 민족 학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조선중앙일보」 아마추어 권투대회에 참관한 이상화 선생 관련 보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화 선생의 뜻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
노력안타깝게도 이상화 선생은 어린 학생들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4월 25일, 위암 선고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젊은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민족을 떠올리며 늘 가슴 아파하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조그마한 일도 마다하지 않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하나가 될 기회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1951년 이상화 선생의 친구 백기만은 그가 생전에 쓴 16편의
시를 수록한 시집 『상화와 고월』을 출간해 그를 기념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39년 거주하던 고택에서의 이상화 선생 [출처: 대구 중구청]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새긴 비석이 고택에 함께 자리한다.
[출처 : 필자 촬영]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략)
2008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된 대구의 명소, 이상화 선생의 고택
[출처 : 필자 촬영]
무엇보다 2001년 소방도로 건설 계획에 따라 이상화 선생의 고택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5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고택을 지키기 위한 서명 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무려 8,600만원의 성금이 모였고, 군인공제회는 이상화 선생의 고택을 매입해 2005년 대구시에 기부했다. 그리고 ‘이상화고택보존운동본부’는 그의 시집과 모인 성금을 대구시에 기증했다. 이에 대구시도 이상화 선생의 고택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2008년부터 시민에게 개방했다. 이상화 선생의 고택을 중심으로 서상돈 고택과 3·1운동 계단 등 인근 지역은 대구를 대표하는 명소로 거듭나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