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이학박사 이원철 박사
글 유정호 인천소방고등학교 역사 교사
유정호 역사 교사는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역사가 아닌, 쉽게 접근해 일상에 활용할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고자 노력한다. 「방구석 역사여행」,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조선괴담실록」,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이야기」 등 역사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출간했다.
‘이원철’이라는 이름의 소행성
우리는 보통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면 일제와 직접 맞서 싸운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분들도 독립운동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분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 박사도 그중 한 분이다.수학·물리에 푹 빠진 20대 조선 청년, 미국에 가다
1896년 서울에서 이중억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원철 박사는 원주율 소수점 아래 수십 자리까지 외울 정도로 똑똑했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 시대, 성리학만을 강조하면서 수학과 과학을 천대하는 관습이 이어져 내려왔기에 수학을 잘하는 것은 인정받기 어려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다수 한국인에게 정규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을뿐더러 일부 한국인들 역시 문관 시험에 합격해 고급 관리가 되거나 판검사가 되는 이가 많았다.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부심을 새겨준 ‘원철성’
대중 종합지였던 「삼천리」는 식민지 상황에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이원철 박사의 업적을 널리 알렸다. 이 과정에서 ‘이원철은 천재라 하리만치 독창성이 있어 수천 년 동안 정예의 과학을 가지고도 수백의 세계 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 개를 역학의 힘을 통하여 발견하였다. 이에 대해 천문학자들은 놀라 마지않아서 그 별 이름을 ‘원철성’ 이라고 칭한다고 한다’라며 이원철 박사의 업적이 세계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알렸다. 이 소식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부심을 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제로부터 온갖 멸시와 무시를 당하며 민족적 자존감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한국인에게 ‘원철성’이라는 한국인 이름을 가진 별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일제 탄압에도 한국의 과학발전과 정체성을 지키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원철 박사는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천문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원철 박사의 생각과 달리 학과를 운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우선 수학과 과학 분야를 공부하려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여기에 교육 자재와 교재 부족 등 자신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던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학과 운영에 모든 힘을 쏟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없었지만, 이원철 박사에게 후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가장 기뻤던 일은 1928년 연희전문학교 천문대에 국내 최초의 15cm 굴절망원경을 설치한 일이다. 학생들이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직접 관찰하며 공부할 수 있게 된 사실에 이원철 박사는 이 망원경을 정말 아꼈다. 1935년에는 한국의 천문학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내한한 은사 루퍼스를 도와 우리 옛 문헌과 유적을 조사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 결과 루퍼스는 한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이원철 박사의 도움으로 우리 천문학사 최초의 영어 논문 「한국천문학사(Korean Astronomy)」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 잡지에 발표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어떤 성취감도 얻지 못하도록 탄압을 일삼던 일제는 한국인의 교육에 앞장서던 이원철 박사를 가만두지 않았다. 1938년 독립운동 단체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에 가입했다는 명분으로 그를 교수직에서 내쫓아버렸다. 그럼에도 학생들과 떨어질 수 없었던 그가 직원 신분으로 학교에 복귀하자, 일제는 이마저도 1942년 조선어학회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탄압해 사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노력한 최대의 성과물이자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굴절망원경이 전쟁 물자로 징발되고 말았다. 이처럼 젊은 날의 모든 활동이 부정당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이원철 박사는 일본식 성명 강요를 거부하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조국의 미래와 자긍심 고취를 위한 선도적 노력
광복 이후 이원철 박사는 독립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 기술 발달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기 위해 군정장관 하지 중장을찾아가 관상감(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정산 등 기상 업무를 담당한 정부기구) 부활을 요청했다. 하지 중장이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원철 박사에게 학무국(조선총독부가 설치한 행정조직.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문교·종교·사회 행정을 관장함) 기상과 과장 자리를 주자, 그는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재조직하고 관상대장에 올랐다. 이원철 박사는 관상대 각 부서를 기상·역서·행정 사무로 세분화하고 지방측후소와 출장소를 설치하는 등 기상 행정 조직을 재편했다.애국심으로 전 생애를 바친, 교육 발전을 위한 헌신
이 시기 이원철 박사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하와이 교민들이 인천에 세운 인하공과대학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과대학인 인하공과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학장으로 부임한 그는 10년간 자신의 모든 교육 지식을 이 학교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연세대학교와 인하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경제와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