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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2 Vol.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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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조국을 사랑한 천문기상학의 선구자

국내 최초 이학박사 이원철 박사


이원철(李源喆, 1896~1963) 박사는 1926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해 대한민국 항성 연구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일제 강점기 조선 민족에게 큰 자긍심을 안겨준 인물이다. 백낙준, 최현배 교수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교수직을 두 번이나 박탈당하기도 했던 대표적인 반일 인사로, 1940년에 창씨개명령을 거절하기도 했다. 군정 치하에서 일제의 기상대를 인수해 관상대장으로 부임했으며 차후 국립중앙관상대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기상과 천문업무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8년부터 1961년까지 초대중앙관상대장으로 근무하며 열악했던 우리나라의 기상 및 천문학 분야를 개선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과학기관인 국립중앙관상대에서 국가의 시간 기준이 되는 역서를 발간하는 등의 업적을 쌓았다. 별과 조국을 사랑했던 이원철 박사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유정호 인천소방고등학교 역사 교사

유정호 역사 교사는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역사가 아닌, 쉽게 접근해 일상에 활용할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고자 노력한다. 「방구석 역사여행」,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조선괴담실록」,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이야기」 등 역사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출간했다.

‘이원철’이라는 이름의 소행성

우리는 보통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면 일제와 직접 맞서 싸운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신 분들도 독립운동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분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 박사도 그중 한 분이다.
우주 소행성은 각각 이름이 있는데, 그중에는 ‘김정호’, ‘장영실’, ‘최무선’ 등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의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여기에 더해 2002년 한국천문연구원이 발견해 ‘이원철’이라 명명한 소행성 ‘2002DB1’도 있다. 대부분 사람에게 생소한 ‘이원철’이라는 이름을 소행성에 붙인 것은 대한민국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이원철 박사에 대한 후배 과학자들의 존경심을 담은 까닭이다.
우남(羽南) 이원철 박사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수학·물리에 푹 빠진 20대 조선 청년, 미국에 가다

1896년 서울에서 이중억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원철 박사는 원주율 소수점 아래 수십 자리까지 외울 정도로 똑똑했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 시대, 성리학만을 강조하면서 수학과 과학을 천대하는 관습이 이어져 내려왔기에 수학을 잘하는 것은 인정받기 어려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다수 한국인에게 정규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을뿐더러 일부 한국인들 역시 문관 시험에 합격해 고급 관리가 되거나 판검사가 되는 이가 많았다.
반면 이원철 박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선교사들이 설립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수학과와 물리학과)에 1기로 입학했다. 당시 수물과에 입학한 학생이 총 4명이었고, 이후 4년 동안 입학한 학생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과는 매우 다른 열악한 환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이원철 박사가 수물과를 졸업하고 성인으로서 직업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학과 과학에 큰 재능이 있던 이원철 박사는 지금 당장 공부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 학과가 폐지될 수 있다는 불안감 등은 생각하지 않고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해 졸업한 이원철 박사는 연희전문학교에서 2년 동안 수학 강사로 일했다. 연희전문학교 스승 베커(Becker)와 루퍼스(Will Carl Rufus)는 이원철의 재능이 비정규직인 강사로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수준이라며 미국 앨비언 대학교 4학년에 편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던 이원철 박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한 결과, 몇 개월 만에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으며 졸업했다.이런 노력은 막막하던 이원철 박사의 앞날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은사 루퍼스는 자신이 천문학 교수로 재직하던 미시간대학교에 이원철 박사의 입학을 허락했고, 자신이 연구하던 맥동변광성(脈動變光星) 이론을 증명하는 일에 참여시켰다. 맥동변광성 이론은 미국 천문학자 섀플리(H. Shapley) 교수가 별 스스로 수축과 팽창을 되풀이한 결과 밝기가 달라진다고 주장한 학설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에 쌍성계를 이루는 두 별이 공전하면서 서로를 가린 결과 별의 밝기가 달라진다는 식변광성(蝕變光星) 이론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당시 루퍼스는 섀플리 교수의 맥동변광성 이론을 증명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어서 이원철 박사에게 독수리자리 에타별을 관측하고 자료 분석하는 일을 맡겼다. 31.5인치 반사망원경과 프리즘 분광기를 이용해 얻은 71회 분광학적 관측 결과를 분석해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임을 밝힌 이원철 박사는 1926년 논문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하늘에서의 운동」을 발표해 한국인 최초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 연희전문학교 시절 베커 교수와 이원철 박사(우측에서 세 번째)
[출처:연세공감]

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부심을 새겨준 ‘원철성’

대중 종합지였던 「삼천리」는 식민지 상황에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이원철 박사의 업적을 널리 알렸다. 이 과정에서 ‘이원철은 천재라 하리만치 독창성이 있어 수천 년 동안 정예의 과학을 가지고도 수백의 세계 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 개를 역학의 힘을 통하여 발견하였다. 이에 대해 천문학자들은 놀라 마지않아서 그 별 이름을 ‘원철성’ 이라고 칭한다고 한다’라며 이원철 박사의 업적이 세계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알렸다. 이 소식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부심을 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제로부터 온갖 멸시와 무시를 당하며 민족적 자존감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한국인에게 ‘원철성’이라는 한국인 이름을 가진 별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개인의 명예와 학구열만 생각한다면 이원철 박사는 미국에 남아 천문학자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버리고 개인의 영위만을 좇을 수는 없었다. 독립을 이루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수학과 과학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미국에서 절실히 통감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고국에서 후학을 양성해 비록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가 한국을 위해 큰일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일제 탄압에도 한국의 과학발전과 정체성을 지키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원철 박사는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천문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원철 박사의 생각과 달리 학과를 운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우선 수학과 과학 분야를 공부하려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여기에 교육 자재와 교재 부족 등 자신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던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학과 운영에 모든 힘을 쏟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없었지만, 이원철 박사에게 후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가장 기뻤던 일은 1928년 연희전문학교 천문대에 국내 최초의 15cm 굴절망원경을 설치한 일이다. 학생들이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직접 관찰하며 공부할 수 있게 된 사실에 이원철 박사는 이 망원경을 정말 아꼈다. 1935년에는 한국의 천문학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내한한 은사 루퍼스를 도와 우리 옛 문헌과 유적을 조사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 결과 루퍼스는 한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이원철 박사의 도움으로 우리 천문학사 최초의 영어 논문 「한국천문학사(Korean Astronomy)」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 잡지에 발표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어떤 성취감도 얻지 못하도록 탄압을 일삼던 일제는 한국인의 교육에 앞장서던 이원철 박사를 가만두지 않았다. 1938년 독립운동 단체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에 가입했다는 명분으로 그를 교수직에서 내쫓아버렸다. 그럼에도 학생들과 떨어질 수 없었던 그가 직원 신분으로 학교에 복귀하자, 일제는 이마저도 1942년 조선어학회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탄압해 사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노력한 최대의 성과물이자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굴절망원경이 전쟁 물자로 징발되고 말았다. 이처럼 젊은 날의 모든 활동이 부정당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이원철 박사는 일본식 성명 강요를 거부하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관 옥상에 설치된 국내 최초 15cm 천체망원경 [출처: 연세공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출처: 연세공감]

조국의 미래와 자긍심 고취를 위한 선도적 노력

광복 이후 이원철 박사는 독립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 기술 발달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기 위해 군정장관 하지 중장을찾아가 관상감(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정산 등 기상 업무를 담당한 정부기구) 부활을 요청했다. 하지 중장이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원철 박사에게 학무국(조선총독부가 설치한 행정조직.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문교·종교·사회 행정을 관장함) 기상과 과장 자리를 주자, 그는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재조직하고 관상대장에 올랐다. 이원철 박사는 관상대 각 부서를 기상·역서·행정 사무로 세분화하고 지방측후소와 출장소를 설치하는 등 기상 행정 조직을 재편했다.
특히 이 시기 이원철 박사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서 간행이었다. 루퍼스를 도우면서 우리나라 천문학의 우수성을 확인한 그로서는 역서 편찬이야말로 광복 이후 혼란한 시대에 사는 한국인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줄 계기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농업 국가였던 한국에는 더더욱 역서가 꼭 필요했다. 광복 이후 한국은 양력이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반감으로 음력을 사용했다. 그로 인해 외국과의 조약 체결 등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역서만큼은 국제사회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이원철 박사는 1961년 관상대장으로 마지막 역서를 발간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원철 박사는 학교 정상화를 통한 교육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1944년 일제가 연희전문학교를 몰수,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꿔 운영하던 것을 바로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연희대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초대 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기상학과를 신설하고, 이공학과 부장을 맡아 학교 발전에 힘을 쏟았다. 연희대학 재단 이사로도 활동하며 연희대학교가 연세대학교로 발전·성장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애국심으로 전 생애를 바친, 교육 발전을 위한 헌신

이 시기 이원철 박사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하와이 교민들이 인천에 세운 인하공과대학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과대학인 인하공과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학장으로 부임한 그는 10년간 자신의 모든 교육 지식을 이 학교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연세대학교와 인하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경제와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된다.
또한 이원철 박사는 YMCA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할 수 없던 시절 YMCA를 통해 꿈을 꾸고 공부한 만큼, 일제 강점기 서울 YMCA에서 많은 강연을 했다. 특히 그가 진행하는 목요 강좌를 수강한 많은 사람은 미래의 과학도를 꿈꿨다.
1963년 이원철 박사가 사망한 후 그의 유지를 받든 부인 김화순 여사는 조의금 전액을 연세대학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또 학술적으로 귀한 가치가 있는 도서 300여 권은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양평군 임야 3만 6,000평과 서울 갈월동 집은 YMCA에 기증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이 나라의 발전을 바라며, 자신의 모든 지식과 재산을 대한민국에 바친 우남 이원철 박사는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독립운동가였다. 케이 로고 이미지
관상대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국내 최초 은반직달일사계를 사용해 일사량을 측정하던 모습 [출처: 연세공감]
1961년 제1회 세계기상일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이원철 박사 [출처: 연세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