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청계천로에서 종로2가로 이어지는 곳에 우뚝 솟은 31층의 삼일빌딩은
1970년 완공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삼일빌딩은 산업화의
상징인 세운상가, 청계고가와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명물로 여겨졌습니다.
삼일빌딩이 유명해진 이유는 설계부터 완공까지 한국의 건축가와 건축 기술이 이룬
성과라는 점 때문이었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커튼월(외벽을 유리로 만든 건축물)
방식을 이용한 마천루라는 것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1978년, 38층 규모의 롯데호텔 본관이 지어지기 전까지 국내 최고층 건물이었던
삼일빌딩은 당시 서울 구경의 필수 코스로 주변에는 층수를 세어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삼일빌딩을 설계한 인물이 바로 우리나라
1세대 현대건축가 김중업입니다.
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제공처: 김중업건축박물관
인생을 바꾼 르 코르뷔지에와의 만남
1939년 일본의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현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한
김중업은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의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 교수에게
수학합니다. 1941년 건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약 2년 동안 도쿄에서
실무를 익힌 후 귀국해 서울의 조선주택영단(현 한국토지주택공사) 기사로
일했습니다. 1947년부터는 서울대학교와 한양공과대학(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건축과 도시계획을 강의했고, 이후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에서도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한편, 당시 널리 퍼진 모더니즘 세계에 심취한 그는 보들레르나 랭보의 시를
낭송하며 당대의 유명한 문인, 화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온 운명적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의 만남입니다.
195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1회 세계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와 만납니다. 김중업이 심포지엄에서 강의할 때
청중석에 있던 르 코르뷔지에가 관심을 표했고, 이때 김중업은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3개월 동안 이탈리아 건축 답사를
마친 김중업은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건축계획연구소를 찾아가 인턴
테스트 기회를 얻었고, 합격해 약 3년 동안 수학합니다. 그래서 그의 초기 건축을
보면 모더니즘의 원리를 철저히 따른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1956년 귀국한 김중업은 건축연구소를 열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가 설계하여 1960년에 착공한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지붕의 처마 선을 콘크리트로 처리했는데, 직선과
곡선의 단아한 구성과 공간 처리가 한국의 전통과 프랑스의 우아함을 아름답게
조화시킨 건축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현대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 작품은 ‘현대건축의 문법으로 한국의 전통성을 추구했다’는 갈채를 받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습니다.
▲ 1970년대 삼일빌딩
현대건축의 흐름을 한국에 전하다
이후 부산의 재한유엔기념묘지(현 재한유엔기념공원) 정문, 이탈리아대사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 김중업의 이름은 국내보다 외국에 먼저 알려졌습니다. 1969년 프랑스
정부가 ‘건축가 김중업’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시사회를 열었던 일은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1971년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 도시정책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을 지지한 필화(筆禍) 사건으로 고국을 떠나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후, 디자인 스쿨로 유명한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과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합니다. 그는 1978년 파리건축대학에서 명예석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하여 성공회 제1회관과 설악파크호텔 등 작품을 설계했습니다.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이어진 그의 활동에 대해
“김중업으로 한국의 건축은 세계 건축의 왕성한 현장을 목격했고, 일정 부분을 함께하며,
그 흐름을 국내로 가져오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 1957년 김중업건축전시회에서의 김중업 건축가
▲ 주한프랑스대사관
▲ 1960년대 재한유엔기념공원 정문
올림픽공원의 상징, 평화의 문
우여곡절 끝에 1979년 귀국한 김중업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진주문화회관
(현 경남문화예술회관), 부산 충혼탑, 올림픽공원의 상징적인 조형물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올림픽 공원의 ‘평화의 문’은 높이 약 24m, 지붕 길이 약 62m의 철근콘크리트
조형물로, 올림픽공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한옥의 처마선을 현대적 모티브와 기술로
구현한 이 문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경기도 안양의 김중업박물관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김중업이
설계한 작품 중 하나인 (주)유유산업의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한 건물입니다. 박물관에서는
그의 일대기와 기록, 그가 설계한 건축물 등을 풍부하게 볼 수 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5월 세상을 떠난 김중업은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보여주었습니다. 조흥은행 본관과 삼일빌딩에는 건축물의 기능을 강조한 합리주의가
드러나 있다면, 제주대학교 본관에는 낙천적인 멋이, 한국교육개발원과 국제방송센터에는
기하학적인 추상의 조형을 담기도 했습니다. 비록 김중업은 떠났지만, 그가 설계한 다양하고
아름다운 건축 ‘작품’은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그의 숨결을 느끼게 합니다.
▲ 김중업건축박물관
▲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