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라희 l 사진 이용기 l 사진 제공 EUS+ 건축사사무소
글 정라희 l 사진 이용기 l 사진 제공 EUS+ 건축사사무소
2011년부터 한국에서 사무실을 운영하다가 2016년에 서민우 건축가와 함께
건축사사무소를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건축대학원을 다니던 시기에 만나
서로 오래 지켜본 사이죠. 동료 건축가로서 교류하며 ‘육아’라는 공통의 화제로
자주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공간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 대학에 출강하며 어린이 건축 책을 집필하고, 어린이 건축 교육 활동도
해왔어요. 덕분에 어린이 공간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다음 세대를 위한 건축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건축사사무소를 열기 전에는 미국에서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주로
복합건축이나 박물관, 미술관 같은 큰 규모의 공간 건축을 해왔습니다. 사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 설계는 대부분 규모가 작고 때로는 구조물에 가까운
작업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형 프로젝트를 10년 이상 해온 경험 덕분에 좀 더
넓은 관점에서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질 수 있었어요. 이런 경험이 자산이
되어, 어른으로서 다음 세대에 좋은 것을 해줘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컸습니다.
박물관, 도서관, 놀이터 등의 공간이 다음 세대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학교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학교는 다음 세대 공간이고, 아파트는 다음 세대 공간이
아니다’는 식으로 명확하게 구분짓진 않아요. 주택을 설계할 때도 다음 세대
공간을 짓는다는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여기서 다음 세대는 어린이와 청소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다름’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어요. 기존의 굳어진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움’과
‘가능성’에 무게를 둔 ‘의지’를 지닌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물론 노인과 장애인까지 다음 세대의 범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 세대(Future Generation)’와는 거리를 두고 봅니다.
‘공간을 만들고 나면 할 일이 끝났다’고 여기는 인식이죠. 해마다 학교 교실과 놀이터 등을 새롭게 바꾸는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하는데요, 예산을 배정하는 분들은 한 해 사업을 집행하고 사업이 종료되면 공간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공간이 만들어진 다음부터거든요. 아이들이 공간을 이용하면서 스스로 필요한 대로 공간을 고치고 바꿔가는 과정에서 다음 세대 공간으로 이어 나갈 수 있어요.
건축 교육은 기능적으로 도면을 그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건축을 통해 각자의 고유한 감성과 감각을 계발하는 측면이 있는데, 다음 세대 건축 교육을 진행할 때도 어린이가 지닌 고유성과 잠재력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기획했어요. 입시와 연관된 교육과정의 거대한 흐름에 건축이 포함되기는 쉽지 않지만 종합적 사고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측면에서 건축 교육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전에 광주 무등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구령대를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워크숍을 하며 아이들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내고, 전시를 열기도 했거든요. 그때 프로젝트를 마친 몇몇 아이들은 “이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세상이 달라 보인다”라는 후기를 전해 준 적이 있어요. 다음 세대를 위한 건축이 아이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예측할 수 없지만, 건축의 교육적 역할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먹고 자는 집과 같은 필수적인 공간인 제1의 공간과 일터나 학교 등 제2의 공간 외의 공간을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3의 공간은 지역, 세대, 경제적 격차를 넘어 누구든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공간을 체험하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주도성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죠. 제3의 공간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배려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서 ‘다음’은 ‘다름’의 의미가 더 강하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움’과 ‘가능성’에 무게를 둔 ‘의지’를 지닌 단어다. 그래서 어린이와 청소년,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배려의 공간도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다
학원이 밀집한 대치동에 가면 ‘사이쉼’이라는 강남구 청소년심리지원센터가
있어요. 강남구보건소에서 파견한 전문 상담사가 청소년을 위한 일대일
상담을 진행하는 곳이죠. 이곳 상담실은 네모반듯한 하얀 벽면의 차가운
공간이 아니에요. 상담실과 상담실 사이에 일부러 여유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잠시라도 마음의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디자인했습니다. 학원과 학원을 오가는 사이에 쉼을
누리는 이 공간의 역할이 드러나는 부분이죠. 또한 공공이 만드는 ‘배려의
공간’인 노원구 장애인 전용 미용실 ‘헤어카페 더휴’ 1호점과 2호점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보통의 미용실과
생김새는 같지만, 점자 가격판, 전동휠체어 전용 자동문 출입구, 기저귀 교환
시설이 설치되어 방문하는 장애인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늘 마음에 담고 있는 화두가 있어요. 건축은 과연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죠. 건축이 항상 사회에 선한 영향을 주는 것만은 아니에요.
권력의 도구로 악용되었던 역사적 사례도 있고요. 그렇기에 건축가로서
다음 세대를 위해 건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가 더 잘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건축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생률 저하, 인구 소멸, 교육 문제 등 다양한 사회 갈등이 한국 사회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건축이 해결해 주진 못하겠죠. 하지만 한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가 작은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작게는 한 구역에서 시작해 크게는 도시에 이르기까지
다음 세대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