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좋은 생각」은 급격히 변화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제시하는
멘토 회원들에게 귀 기울이고 교육 철학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는 코너입니다.
일상의 도전에서 느끼는 희열 물리학자이자 가수 씨엘 아버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이기진 교수
전공(專攻). ‘오로지 하나를 닦다’라는 뜻이다. 이기진 교수의 전공은 물리학이다. 30년 넘게 물리학을 갈고 닦았다.
그러나 같은 세월 동안 그의 손에서 빛을 얻은 것은 물리학 하나뿐이 아니다.
이기진 교수의 부전공은 ‘딴짓’. 펜, 붓, 대본 등 그가 어떤 것을 손에 드느냐에 따라 전혀 딴 세상이 펼쳐진다.
글
이성미 /
사진
김수
※ 모든 인터뷰 및 사진 촬영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해서 진행했습니다. *씨엘(CL) : 2009년 그룹 ‘2NE1’으로 데뷔, 가수이자 래퍼
“해보지 뭐”에서 시작된 다재다능한 딴짓들
경복궁을 옆에 끼고 한옥과 현대식 건물, 야트막한 산책길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촌. 그곳에 ‘창성동 실험실’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갤러리가 있다. 갤러리 관장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이기진 교수다.
한옥에 노란 대문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창성동 실험실처럼 이기진 교수에게는 ‘과학자’이면서, 에세이를 쓰고 동화도 짓는 ‘작가’라는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
또 그는 화가이며, 도예가, 수집가,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적인 뮤지션 씨엘(CL)의 아빠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해내다니! 물리학자인 그가 시간을 두 배로 쓰는 방법을 발견한 걸까? 아니다.
다재다능의 원동력은 ‘해보지 뭐’에 있다. 물론 이기진 교수가 ‘해보지 뭐’ 하는 것은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이 아니다. ‘완전한 실패도, 완전한 성공도 없다’라는 달관(達觀)이다.
“누군가 ‘해볼까?’ 물으면 저는 ‘하자’라고 해요. ‘책을 내보자’ 하면 ‘어떤 책을 내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식이죠. 결과는 예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고, 그러다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전자라고 해도 실패했다고 의기소침해지지 않아요.
당장은 실패처럼 보이는 일도 지나고 나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 실패가 ‘생명을 잃었다’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저는 오히려 실패만큼 순수한 재산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성공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도 없어요.
출판물이든 어떤 작품이든 세상에 나온 것은 이미 제 손을 떠난 것들이에요.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이기진 교수가 다양한 일에 도전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은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현실과의 간극이 발생하고, 그 사이에 불행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진 교수는 무엇을 하든 기대치를 높은 곳에 두지 않는다. 그랬더니 어떤 취미든 오래 두고 보며 사랑할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이기진 교수가 운영 중인 갤러리 ‘청성동 실험실’ 외관
공을 들이면, 딴짓으로도 프로가 된다
기대치도 낮다. 다양한 일을 한다. 그러면 당연히 깊이가 부족하리라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기진 교수는 여러 방면에서 프로의 경지에 올랐다.
특히 물리학자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절대 소홀함이 없다. 현재 그는 피를 뽑지 않고 디지털카메라 촬영으로 혈당치 농도 측정을 가능케 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최근에는 이 과제의 핵심 기술인 ‘메타물질을 이용한 전자기파 측정 방법’을 최초 개발했다. 안식년인 지금도 그는 꾸준히 학교에 나가 연구를 계속한다.
좋아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는다. 그동안 출간한 책만 20권이 넘는다. 두 딸에게 한글 공부를 시켜주기 위해 만들었던 동화 『박치기 깍까』를 2004년 정식 출간(2012년 개정판 출간)했고,
전 연령이 쉽게 과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보통날의 물리학』, 『하루하루의 물리학』, 『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물리학』 등을 펴냈다.
파리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엮은 『꼴라쥬 파리』, 『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와 에세이집 『20 UP 투애니업』, 『2NE1 씨엘아빠, 이기진 교수의 서울 꼴라쥬』 등도 있다.
이기진 교수가 틈틈이 그린 드로잉은 갤러리에 전시되고 책의 삽화로도 쓰인다. 취미 삼아 만든 로봇 조형물 ‘뚜띠’는 프랑스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박물관 아트숍에도 진열되었다.
갤러리 창성동 실험실은 평일에는 이기진 교수의 작업실로, 주말에는 전시 공간으로 사용된다. 그의 수집품들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갤러리는 비영리로 운영되어, 신진 예술가들도 부담 없이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한다. 지난해 10월에는 발달장애인 아티스트 정은혜 작가의 전시가 진행됐다. 최근 이기진 교수가 추가한 딴짓은 ‘연기’다.
서촌을 배경으로 한 독립영화에서 책방 주인을 짝사랑 하는 ‘갤러리 사장’ 역(役)을 맡았다.
이토록 많은 영역을 전문가 수준으로 끌어올린 비결은 ‘꾸준함’에 있다. 단번에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차근차근 실력을 쌓는 것이다.
따라서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앞으로의 목표도 ‘오늘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 앞에는 ‘열심히’가 붙어서 딴짓도 빛나게 한다.
“어떤 분야든 처음 시작할 때의 실력은 다들 비슷해요. 하지만 누가 오래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죠. 제 실력도 처음에는 형편없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는 안 되나 보다’하고 포기할 때 저는 ‘안 되겠지만 해보자’ 한 것뿐이죠. 그렇게 10년, 20년 했더니 이제는 좀 볼만해진 것 같아요.”
아이를 나와 ‘딴 사람’으로 인정해주세요
이기진 교수를 졸졸 따라다니는 또 다른 단어는 ‘자녀 교육’이다. 그의 딸은 세계적인 뮤지션인 씨엘. 씨엘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기진 교수에게 “아빠, 나 학교 그만두고 싶어”라고 하자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씨엘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아빠가 ‘안 된다’고 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한 번도 ‘안 돼’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기진 교수는 어릴 때부터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며, 아이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줬다.
“열정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본인이 하는 일에 성취감을 느낄 때 만들어지는 것이죠. 부모가 억지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따라서 부모는 아이가 열정을 불러일으킬 일을 찾고 발전시켜나가도록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간섭’이 아닌 자녀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해주세요.
그래야 서로 존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부모가 ‘오늘부터 지켜보기만 하겠다’라며 갑자기 바뀌면 아이가 혼란스러워합니다. 지금처럼 하세요. (웃음)”
이기진 교수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는다.
열정을 찾는 것은 학생의 몫이다. 교사는 지켜봐 주고 ‘칭찬’ 이라는 지원을 더 해주면 된다. 틀린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면 된다. 그리고 교사도 행복하면 된다.
“좋은 교사가 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사실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들이 행복하시면 좋겠어요. 학교에서는 교사로서 최선을 다하시고, 또 취미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세요. 좋아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만큼 좋은 교과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들도 딴짓하세요. 그리고 행복해지세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는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길을 선택해 걸으면서 다른 길을 흘끔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기진 교수는 다르다.
그의 길은 돌다리와 같다. 그는 두 개의 돌 위에 서기도 하고, 돌을 가져와 새 길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뻔하지 않다. 재밌다. 아마 그가 돌다리에서 내려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길로 걸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기진답다”라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