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사전을 이긴 종이 사전의 힘
21년 전 교복을 입던 학창 시절, 전자사전을 처음 갖게 됐다. 부모님이 사주신 전자사전의 가벼운 무게와 놀라운 속도, 자료의 방대함은 매번 놀라웠다.
전자사전이 생긴 뒤 내 방 책꽂이 한구석에 두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국어사전, 영어사전, 한자 사전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무거워서 들고 다니지도 못하는 종이 사전이잖아!” 그렇게 몇 년 정도 전자사전을 잘 썼다.
하지만 이내 종이 사전으로 돌아왔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책장, 손가락 끝과 시선 끝의 교집합에서 찾아낸 단어는 잊히질 않았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하는 재미를 종이 사전이 다시 가르쳐 준 것이다. 종이가 주는 충만한 물성이 전자사전의 ‘빠름’을 이겨버린 것이다.
내 손끝과 눈길로 직접 찾아낸 단어라는 엉뚱한 애착까지 겹치며 괜히 공부가 더 잘 되는 느낌도 들었다.
‘종이로 된 교과서는 정말 무겁기만 한 교육 현장의 골칫거리에 불과한 걸까?’ 교육 현장에서 디지털교과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전자사전과 종이 사전에 얽힌 옛 추억을 떠올리며 이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코로나19 이후 필요성이 커진 디지털교과서
디지털교과서는 기존 서책용 교과 내용에 용어사전, 멀티미디어 자료, 실감형 콘텐츠, 평가 문항, 보충학습 내용 등 추가적인 학습 자료와 학습 지원 및 관리 기능이 더해진 교육용
콘텐츠로 태블릿 PC 등 디지털기기를 통해 학습하는 것이 특징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중심의 온라인 학습이 늘어나면서 디지털교과서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교육부는 초등학교 3~6학년 사회·과학 디지털교과서를 ‘검정’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0년 9월 발표한 계획에 따라 올해부터 학년 군별로 디지털교과서가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교과서 검정 전환을 통해 품질과 창의성 측면에서 우수한 디지털교과서가 많아지길 기대하는 교육 현장의 반응도 있다.
디지털교과서 이용 대상과 과목을 살펴보니 초등학교 3~6학년과 중학교 1~3학년의 경우 사회·과학·영어 과목이다.
고등학교는 영어, 영어 회화, 영어1, 영어 독해와 작문 등이 해당한다. PC와 노트북으로 이용할 때는 웹 뷰어를 설치하고, 모바일은 앱 뷰어를 설치한 뒤 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도 디지털교과서의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한다.
디지털교과서로 만나는 실감 나는 진로·안전교육
벌써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하고 있는 우수 사례들도 있다. 광양제철남초등학교에서는 태블릿 PC를 이용한 과학 수업을 진행했다.
스마트 현미경을 활용한 동식물 관찰 실험을 했는데, 이때 학생들은 디지털교과서를 통해 과학 수업에 참여하고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심화 활동을 진행했다.
디지털교과서는 과학, 영어 등 주요 과목뿐만 아니라 진로 교육, 안전교육에도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여름철 물놀이 안전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 비상대피 훈련 등의 안전교육은 디지털교과서 속 VR을 체험하면 상황을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실제 각 지역에 마련된 안전체험교육관 등에 가보면 VR 등 디지털 자료를 이용하여 ‘실제 재난 상황’에서 대피 요령을 체험하는 코너가 있다.
일방적인 이론 강의식 안전교육보다 디지털 자료를 이용한 안전교육이 기억에 더욱 잘 남는다고 한다. 몸이 기억하고 실제 상황에 즉각 반응하는 안전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진로교육과 안전교육 관련해 디지털교과서는 활용 가치가 높다고 본다.
교육부 관계자들은 “시청각 자료 없이 글을 읽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는 학생들은 디지털교과서가 제공하는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와 실감 나는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더욱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라며
“학생들의 자기 주도적 학습과 체험형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교사와 학생 간 의사소통 역시 더욱 활발해질 수 있다”라고도 말했다.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하며 온라인 학급 개설 후 학습 커뮤니티로 활용하는 ‘위두랑(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만든 온라인 학습 커뮤니티)’을 통해 교사와 학생 간, 학생 상호 간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디지털교과서가 ‘가볍지만 가볍지 않다’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급격하게 성장한 디지털교과서에 대한 인식 변화
10년 전 디지털교과서 개발 초기에 교과서를 발행하는 기업의 책임자를 취재했을 때 관련 시범사업 만족도는 낮은 편이라고 언급했었다.
당시 전국 학교에 초고속망 등 교육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디지털교과서는 서책형 교과서를 보조하는 학습 자료로써의 역할이 더 크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여건이 많이 바뀌었고, 코로나19로 인해 전면적인 온라인 학습 전환이 일어난 후 공교육 현장에서도 디지털교과서에 관한 거부감이 낮아진 편이다.
미래 교육의 관점에서 사회과 디지털교과서 지리 단원에서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을 활용한다. 지형의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고, 실제 현장에 간 듯한 느낌을 주어 풍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과학과 과목들 역시 개념 영상 시청, 과학실험 관찰, 심화 학습하기 등의 활동이 가능하다.
10년 전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입체적이고 생생한 시청각 효과 기술을 제공하는 디지털교과서는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360° 사진 및 영상을 통해 직접 체험하기 힘든 상황을 현실처럼 재현해 준다.
연계 실감형 콘텐츠 307종도 제공된다. 수업 이해도가 크게 올라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에서 나아가 풍부한 학습 자료를 제공하고 실시간 학습 지원 및 관리 기능이 탑재된 미래형 학습 도구로 변화했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시간 동안 디지털교과서를 둘러싼 환경도 급변한 것이다.
제대로 된 스마트교육을 위한 디지털교과서의 가야 할 길
코로나19가 시작된 뒤 2020년 8월 기준으로 디지털교과서를 다운로드한 횟수는 1,182만 1,353건으로 전년(197만4,864건) 대비 6배로 폭증했다.
그런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교사 1,879명 중 1,229명(65.4%)이 ‘원격수업 중 디지털교과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디지털교과서를 내려받았지만 수업 현장에서는 잘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각 교실의 선생님들이 전례 없는 팬데믹 상황을 맞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려받았지만 활용 가치가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디지털교과서가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의 작은 발판이 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교육 콘텐츠뿐만 아니라 단말기 보급, 망 구축 등 기술적 환경이 전체적으로 갖춰져야만 할 것이다.
또 현직 교사들의 정성 어린, 깊이 있는 수업에 발맞춰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디지털교과서의 쌍방향성이 보장되어야 하겠다.
무엇보다 ‘종이 교과서는 정말로 무겁기만 한, 사라져야 할 존재일까?’ ‘아이들이 모든 학습 자료를 꼭 빨리빨리 찾아야만 하는 걸까?’라는 물음에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만 디지털교과서의 활용 가치도 올라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