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선 위트와 재미 담긴 국내 최초의 곤충 저서
‘물속의 폭군들 납시오!
물장군과 장구애비와 게아재비, 게으르고 둔하지만, 천재적인 시골 악사들 여치와 민충이,
천재 음악가와 깡패의 두 얼굴의 소유자 귀뚜라미…’ 곤충에 대한 섬세한 설명과 유머, 흥미로운 그림을 비롯해 당시 우리나라와 만주 지역의 풍속을 담고 있어 사료로써의 가치도 지닌 「곤충기」를 황의웅 작가가 재해석한 「조복성 곤충기」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동물학자이자 교수인 조복성 박사가 집필한 이 책은 우리 땅에 사는 곤충들에 대한 38가지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용 책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쓴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시대를 앞선 위트와 재미, 읽기 쉬운 글과 그림들이 담겨있다. 세계 자연과학사에 길이 남는 걸작이 「파브르 곤충기」라면 국내 최초로 곤충학의 시원을 열고 자연과학의 근간을 마련한 기록은 조복성 박사의 「곤충기」다.
곤충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조복성 박사의 「곤충기」를 엮은이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2011년에 출간된 「조복성 곤충기」
조복성 박사가 직접 그린 곤충 그림들
[출처: 한국문헌정보학회지]
세상 작은 것들에 관한 탐구의 시작
조복성 박사(1905~1971)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05년은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해였고, 1910년 경술년엔 나라를 잃었다. 외아들이면서 위로 4명의 누나가 있었던 그의 외가는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사슴, 두루미, 꿩 등 가축이 아닌 동물들을 기르고 있었다. 외가에서 이런 동물들과 함께 놀면서 동물에 대한 특별한 호기심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16년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상수보통학교에 입학해 근대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때 곤충 채집 활동을 하며 곤충에 관한 애정이 더 높아졌다. 집에 종이상자가 보이면 채집 상자로 사용했고, 어머니 반짇고리의 바늘을 곤충 고정핀으로 활용했다. 때문에 어머니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상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복성 박사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생물 담당 교사는 일본인 도이 히로노부였다. 도이 선생 역시 동물 연구와 채집 활동에관심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도이 선생에게 조복성 박사는 쉽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선배들과 채집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평안남도에서 함경남도에 이르는 곳곳의 마을들을 다니는 27일간의 여행이었다. 도이 선생도 소식을 듣고 함께 했다. 이 과정에서 조복성 박사는 도이 선생으로부터 곤충 채집과 분류, 표본 제작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을 피부로 경험하게 된다.
도이 선생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며 후임 교사인 고바야시에게 조복성 박사를 소개해 계속해서 곤충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2학년 때 떠난 금강산 채집 여행을 통해 얻은 채집품은 1947년 「금강산 동물지」라는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4년간의 평양고등보통학교 생활이 마무리될 무렵 학자로서의 가능성을 알아본 일본 교사들은 그가 계속해서 곤충학을 수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황해도 해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로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온다.
일생을 바쳐 우리 땅의 곤충 연구에 몰두한 조복성 박사
[출처: 동아일보]
조국의 교육을 위한 학자로서의 성장과 소명
당시 황해도 교육 당국은 경성제국대학 예비과정에서 생물학을 강의하던 모리 타메조를 초청하여 황해도 보통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생물학 특강을 진행했다. 이때 황해도 교육 당국은 환영의 의미로 조복성 박사에게 부탁하여 그의표본을 전시했고 모리 타메조는 조복성 박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 인연으로 인해 1925년 여름방학 때 모리 교수와 조복성 박사는 함경도 일대로 3주간의 채집 여행을 하게 됐고, 모리 교수로부터 동물분류학을 자연스레 배웠다. 1926년에는 3주간의 백두산 탐험대에 참가했고, 또 2년 뒤인 1928년에 울릉도로 채집하러 가게 되었다. 울릉도에서의 곤충 채집과 연구는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복성 박사는 울릉도 채집 여행 후 나비목 곤충 목록을 발표(1929)했는데, 「울릉도산 인시목(鱗翅目)」이라는 한국 최초의 곤충학 관계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에 발표했다.
조복성 박사를 기리기 위해 나비 이름에 '조'를 붙인 조흰뱀눈나비
조복성 박사의 행보가 신문기사로 소개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졌다.
[출처: 동아일보]
일본의 동물학을 뛰어넘는 저명한 곤충·동물학자가 되어 식민지 조국의 교육에 이바지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1930년 경성제국대학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 1934년에는 국내에 분포한 나비들을 도이 히로노부와 모리 타메조와 함께 정리해 엮은 「원색조선의 나비(原色朝鮮の蝶類)」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 책의 자료로 활용된 것은 조복성 박사가 정리한 표본과 손수 그린 그림으로 만든 나비 도감이었다. 그리고 51편의 논문을 작성했고, 채집 여행을 스스로 기획하여 떠났다. 당시 장수하늘소를 처음으로 발견해 기록하기도 했다. 1941년엔 모리 교수의 소개로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조복성 박사는 ‘어디에 가든지 내가 전공으로 하는 곤충을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는 게 목적’이라는 학자로서의 신념에 따라 다양한 지역의 곤충상을 연구했다.
곤충학을 대중에게 알리고 후학 양성을 결심하다
순수 학문일지라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과 함께 연구한다는 것에 망설임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내가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중국에서 얻게 될 광범위한 지식과 정보도 제국주의자의 손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생각에 당시 중국에 있는 일본 정부 기관의 요청으로 난징, 항저우, 기후의 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됐다. 조복성 박사는 이 시기에 동물학을 연구하였는데 이를 통해 곤충 전문가로서 그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됐다.
때마침 조선에서도 과학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로, 조복성 박사가 과학자로서 성장하기에 좋은 시기였다. 조복성 박사의 연구 활동은 곤충 관련 논문 발표로 이어졌다. 이를 당시 언론들이 주목하고 보도하거나 동아, 조선과 같은 신문사들은 곤충 표본 전람회를 개최하고 그의 소장 표본들을 소개했다. 이후 조복성 박사는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연재해 우리나라 토종 곤충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보가 신문 기사로서 소개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는 일제강점기, 연구에 몰두한 과학자였다. 조복성 박사는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독립한 조국에서 과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곤충의 대중화에 힘쓰며 과학자로서 연구 활동을 계속해야 하고 후학을 양성해야 한다는 입장이 분명했다.
대중과학서의 시작, 「곤충 이야기」와 「곤충기」 출간
해방 후 많은 국가기관이 설치됐는데 국립과학관도 그 중 하나였다. 중국박물관에서 근무한 조복성 박사는 국립과학관
운영의 총책을 맡아야 했다. 1945년 국립과학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일본어로 된 동식물의 명칭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에 참여했고 1946~1947년에는 과학박물관 동물학연구부에서 발간한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연구보고」에 하늘소와 곤충의 조선어 명칭을 정리한 논문을 비롯하여 4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으며, 곤충과 동물에 대한 저술도 많이 출간했다. 그중에서도 1948년 발간한 「곤충 이야기」와 「곤충기」는 그의 대표 저서이다. 「곤충 이야기」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도서라면, 「곤충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었다. 일제 강점기로 인해 열악했던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교육, 문화 등을 진작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중 「곤충기」는 60여 종의 토종 곤충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동안 관심받지 못한 곤충의 생태를 꼼꼼히 그려낸 필치는 화려하지 않지만, 어린아이의 호기심 넘치는 따뜻함이 배어있다. 곤충에 대한 관찰학적 지식은 물론, 그 당시가 아니면 듣기 힘들거나 체험하지 않으면 접하기 어려운 문화사들도 가득 담겨있다. 예리한 과학자의 눈
뒤로 문학적 감성도 생생히 살아있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시대상을 곤충의 습성과 엮어 위트 넘치게 들려주는 부분은 백미라 평가할 만하다.
연구중인 조복성 박사
[출처: 한국중앙연구원]
「곤충기」 표지
[출처: 한국문헌정보학회지]
조복성 박사는 곤충에 대한 저서를 다양하게 집필하였다.
[출처: 한국문헌정보학회지]
곤충학을 뛰어넘어 한국 근대 자연과학 연구의 초석이 되다
한국 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곳곳에서 다시 교육 활동이 시작됐다. 조복성 박사는 1953년 성균관대학교, 1955년 고려대학교에서 각각 동물학 교수로서 후학들을 양성했고 1971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고려대학교에서 과학자 겸 교수로서 활동했다. 고려대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학부의 곤충학, 동물분류학 및 실습, 야외실습, 일반동물학실험, 농림곤충학, 임해실습, 진화론, 해부학실습 등의 여러 교과목을 가르쳤고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1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외에도 대학용 각종 생물학 교재, 곤충학 보급을 위한 다양한 책자, 중학교용 과학책 등의 15권을 저술하였다.
한국 생물학 발전을 위한 왕성한 활동도 이어졌다. 1957년 초대 동물학회 회장직을 맡았고 1963년에는 미국의 생태학자들이 국내의 자연환경을 돌아보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연 보존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을 계기로 결성된 ‘한국 자연 및 자연자원보존 학술조사위원회(현재의 한국자연보존협회)’ 초대 회장직을 맡아 비무장지대의 학술조사단을 이끌기도 했다. 1970년 가을, 국내의 곤충학자들이 고려대학교에 모여서 한국곤충학회를 창립했는데 이때 그는 명예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조복성 박사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 대한민국 학술원은 1960년 7월에 저작상을, 경북대학교에서는 1961년 3월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1970년 12월 정부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척박한 연구 환경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사명으로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조복성 박사는 이 땅의 후학 양성을 위해 교육자로서의 다각적인 활동에도 책임을 다했다. 1971년 타계 후에는 남은 재산과 아끼는 표본, 연구자료와 서적 등을 장학회와 교내 도서관에 모두 기탁·기증하도록 해 후진양성의 뜻을 이어가도록 했다. 그의 노력은 대한민국 근대 동물학, 자연과학 연구에 초석이 되어 지금까지도 관련 학문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커다란 자산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