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장 | 사진 넷플릭스
글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장 | 사진 넷플릭스
“나는 무조건 서울놈한테 시집갈 거야. 섬놈한테는 절대. 급기야 노스탤지어도 모르는 놈은 절대! 네버!”
억척스러운 해녀 엄마 밑에서 야무지고 똘똘하게 자라는 섬 소녀 ‘애순’이 있다. 애순은 반드시 제주를
떠나 서울 대학에 진학해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1960년대 제주, 애순이 꿈을 이루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다. 배를 곯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시절,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애순에게는 지독한 가난이 운명처럼 따라다닌다. 엄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딸이 꿈을 이루도록 돕고 싶지만, 해녀질로는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뿐이다.
넷플릭스 16부작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당차고 발칙하게 살아가는 소녀
애순의 삶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 곁에는 무쇠처럼 우직하고 단단한 소년 ‘관식’이 있다.
하지만 ‘폭싹 속았수다’는 단지 이들만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거친 현대사를 모질게, 그러나 슬기롭게
살아낸 이 땅의 모든 여성에게 바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힘들고 고된 삶 속에서도 순간순간 반짝이던
작은 행복이 보석처럼 빛난다.
제주 방언으로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지난 시간을 묵묵히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이자 헌사다.
밥 한 끼조차 먹기 쉽지 않던 시절, 그 엄혹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해녀 공동체가 있었다. ‘잠녀(潛女)’ 또는 ‘좀녀’라 불린 제주 해녀들은 먹고살 의지만 있다면
기꺼이 물질을 가르쳐 주었다. 바다는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물엣 것은 공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능력껏 물질하며 수확하는 것이지만, 물질에 능한 상군 해녀들은 적게 채취한 하군 해녀들에게 남모르게
일부를 나눠주었다. 이를 ‘게석’이라 불렀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젊은 하군 해녀들은 나이 든 상군 해녀를 위해 ‘불턱’의 상석을 양보했다.
상석은 연기가 가지 않는 자리였다. 해녀들의 문화는 배려와 존중 그리고 격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맨몸으로 바다 깊은 곳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의 일은 위험천만하다. 물속은 변덕이 심했고,
한순간의 실수가 사고로 이어졌다. 오죽하면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이 나왔을까. 해녀들은
숨병을 비롯해 저체온증, 폐질환, 관절염 등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전복 하나라도 더 캐려 마지막까지
물속에서 버티던 애순의 엄마, 광례 역시 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마저 잃고 홀로 남은 애순을 반겨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돈 많은 재혼남과 맞선 제안이
들어온다. 배를 몇 척이나 가진 선장이라는 남자. 애순의 인생을 단번에 바꿀 기회가 될까?
2016년, 유네스코는 제주의 해녀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맨몸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 기술뿐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강화하고 안전을 기원하는 ‘잠수굿’, 해녀들이 부르는
노동요 ‘해녀 노래’, 깊은 잠수 후 수면 위로 올라와 몰아쉬는 ‘숨비소리’까지 모두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정한 것이다.
척박한 화산섬 제주에서는 대규모 농사가 어려웠고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중요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이에 대해 “해녀 문화는 공동체 내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으며, 생태
친화적인 어로 활동과 공동체에 의한 어업 관리가 지속 가능성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목숨을 걸고 바다로 뛰어드는 해녀들이 세상 무서워할 게 뭐가 있었을까. 가출한 애순과 관식이 부산
남포동의 여관에서 패물이 든 가방을 도둑맞자, 이를 되찾으러 간 관식의 엄마는 여관에 눌러앉으며
이렇게 말한다.
“야, 너 제주에 왜 도둑이 없는 줄 알아? 우리는 씨를 말려. 질릴 때까지 씨를 말려. 뺏긴 놈이 아니라
훔쳐 간 놈이 질려서 미쳐 돌아갈 때까지 씨를 말려.”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해녀들은 강인했다. 그들의 문화는 생업을 넘어, 공동체의 단단한
결속과 생존을 위한 지혜가 깃든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