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퇴직을 3년 남짓 앞둔 시점에서 새로운 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4년 간격으로 발령을 받고 새로운 부임지에 정착해 교직 생활을 이어오고 있지만,
이번엔 기나긴 그것의 종착역임을 실감했다. 그동안 열정을 가지고 임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부족함을 깨달을 때면 교직 생활에 깊은 회의감이 들곤 했다.
그래도 아직 조금 남은 교직 생활에 대한 안도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고 싶은 소망을 안고 새로운 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난생처음 기숙학교라는
특수한 환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학생이 80명가량인 작은 규모의 학교지만 전라남도 각 군에서 본인 의지로 지원한 학생들이 저녁에는 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면학 활동과 방과 후 활동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시설이 매우 훌륭하고, 취타대 연습을 할 때면 그 멋진 소리가 밤하늘에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학생들은 선후배 사이에 끈끈한
학우애가 돋보이며, 교사를 대하는 태도도 애틋해 40년 전 1980년대 학생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순수하다.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란 바로 이런 학교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우리 학교의 특색 사업으로 ‘사랑의 김장 김치 나누기’를 시작했다. 이는 김장 배추를 잘 심고 가꿔 김장 김치를 담근 후에 어려운 분들께 나눠 드리자는 취지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나 선뜻 누구도 배추를 심고 가꾸겠다고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배추는 아무나 재배하기 어려운 채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2022년 8월 25일 용기를 내 교장 선생님께 건의했다. 급식실 가는 길목에 무성한 풀과 함께 놀고 있는 유휴지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교장 선생님도 “꽃을 심어야지요”라고 말씀하시더니, 이내 돌아서며 “그러면 한번 해볼까요?” 하셨다.
교직원들에게도 배추 재배를 공식화했다. 이 일이 모험인줄 알지만 한번 해보자는 약속이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약속하듯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장 선생님의 물심양면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 땅을 삽으로 팔 때 첫 삽도 떠 주셨고 배추 모종, 비료 등 필요한 것을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을 다 집행해
주셨다. 가끔은 벌레도 잡아주셨다. 한 번도 경작한 적이 없는 땅을 판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잘 파지지도 않아 물을 뿌려 땅을 축축하게 적시고 달래가며 파야 했다.
3~4일 지나자 채소밭의 윤곽이 드러났다. 처음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의지로 비닐멀칭(mulching)도 했다. 9월 1일, 드디어 채소를 심을 수 있었다. 학교에선
배추뿐 아니라 여러 가지 모종을 사주셨다. 덕분에 배추, 무, 쪽파, 당근까지 심을 수 있었고 집에서 가져온 싹튼 감자로 감자밭도 일구었다.
학생들과 교사들이 함께 배추를 수확하고 있는 모습
배추를 심은 지 5일 만에 무서운 태풍이 휘몰아쳤다.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데 폭우로 배추밭에 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배추밭이 잠길 위기였다. 홍수가 난 것이다.
비가 몰아치는 캄캄한 저녁, 우비를 입은 후에 삽을 들고 물길을 내주었다. 배추밭에 고랑이 있지만 물이 배수구로 빠져나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태풍에
어린 배추들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이 하룻밤이 지나고, 고맙게도 태풍이 물러갔다. 다음 날 아침, 배추밭을 살펴보니 어린 배추들은 다행히 무사했다. 내가 터준
물길 덕분에 그 많던 빗물이 싹 빠져나간 것이다.
배추는 무럭무럭 자랐다. 언덕배기에 심은 쪽파도, 아래쪽에 심은 무와 당근도 모두 잘 자랐다. 자기 전에 유튜브 농사 채널을 보며 농사 공부를 하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출근 전까지 채소밭에서 채소를 돌봤다. 아침에 채소밭에 도착하면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하나 상태를 살피고, 물 주고, 어떤 채소에는 퇴비를 더 주기도 한다.
어느 날은 청개구리가 배춧잎에 앉아 있었고, 또 어느 날은 카메라에 애벌레도 잡혔다. 매일 사진을 찍어 상태를 파악하고, 그날그날 채소밭 뉴스를 배추밭 일지에 기록했다.
동네 할머니도 배추 구경을 하러 오셔서는 배추 잘 큰다고 좋은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즐거웠다. 어떤 학생은 배추밭에 들어와 물을 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배추밭에 나와 채소들을 돌보고 있으면 지나가던 학생들은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는 엄청난 응원이자 힘이 된다.
어느덧 배추를 심은 지 40일이 지나 배춧속이 차오르는 결구가 시작된 것을 보니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내 눈에는 배추가 장미처럼 보였다. 처음에 나 자신도 이
황무지가 채소밭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일단 시작했고, 일은 벌어졌다. 지금까지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한 마음이다. 앞으로 김장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채소밭을 계속 열심히 돌볼 것이다. 우리 학교의 전 가족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사실상 모두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학교 가족들은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다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믿고 싶다. 그래서 나는 밤에 배추
농사를 공부하고, 아침에 일어나 배추와 만나는 이 생활이 즐겁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다. 아침이 되기를 너무나 기다리는 나날이다. 덕분에 내일이 기대되는 경험으로
하루가 가득 차 있다. 내 삶에 희망을 주었으며,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생태 체험의 소중한 기회가 됐다고 믿고 싶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채소에도 감사하다.
나는 이 계절에 배추밭에 찾아오는 방아깨비, 청개구리, 애벌레도 때로는 한 가족이며 귀여운 손님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전교생이 지나다니며 보는 곳에 김장 배추가
자라고 있다는 것, 이만큼 특별한 일이 더 있겠는가! 참 감사하고픈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