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이 점지해 준 3대 독자
이미륵 선생은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의 부유한 천석꾼 집안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마흔 중반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던 어머니가 집 근처 사찰의 미륵불에게 지극 정성으로 빌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본명은 이의경이나 어머니가 미륵불의
은덕으로 점지받은 아들이니 집안사람들과 아랫사람들에게 미륵이라고 부르게 해 미륵이 그의 아명이 되었다.
이의경 선생이 해주보통학교를 다니던 1910년에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설상가상 선생의 아버지가 병환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이후 선생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업을 이어야 했기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뒤 집안이 안정되자
다시 학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독학을 해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의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3·1운동 한복판에서 만세를 외치다
1919년, 이의경 선생이 3학년 새 학기 준비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무렵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경성의전
친구들과 함께 주저 없이 만세 시위에 뛰어들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일본 경찰들의 대립을 목격한 그는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의경 선생은 전국적인 3·1운동이 잠잠해진 5월 외교 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 지침으로 표방한 ‘대한청년외교단’(이하
청년외교단)이 결성되자 이에 가입해 단체 기관지「외교시보」의 발행과 인쇄를 책임지는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청년외교단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8월 29일을 기해 본격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선생은 이날 배포한
‘국치기념경고문’의 제작과 인쇄를 담당했다.
“신성한 우리 형제자매는 오늘을 기억해야 한다. 10년 전 오늘 8월 29일 우리 민족의 중추 기관은 하루아침에 중단되었다.
담대하라. 현재 우리 민족은 동서 열강에 분주하게 원통함을 호소한 10년 전의 국치를 씻으려 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이 기념일에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라.”(국치기념경고문)
이의경 선생이 활동하던 청년외교단은 경찰에 활동 정보가 누설되고 동지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선생도 경찰의 체포 대상이 되었으나 어머니와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일본은 청년외교단
관련자들을 기소했고, 1920년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 역시 궐석재판이지만 재판을 받아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왼쪽 두 번째가
이의경 선생에 대한 판결
[출처: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망명생활에서도 꺾이지 않은 독립운동의 의지
대한적십자회의 활동을 알리는 기사(「신한민보」 1920. 4. 16.)
왼쪽 맨 위가 이의경 선생(이미륵)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상하이로 피신한 이의경 선생은 191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립한 보건 후생 단체인 대한적십자회의 대원이 되었다.
의학도였던 그는 간호사 양성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마침 상하이에 머물러 있던 안중근 의사의 미망인과 가족을
만날 수 있었고,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과 함께 1920년 4월 유럽으로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이의경 선생은 프랑스
마르세유를 거쳐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갔다.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의 빌헬름 수사가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했고, 안봉근이
그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 덕분에 수도원에 머물며 독일어를 익힐수 있었다. 수도원의 도움으로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이어가던 그는 1925년 뮌헨대학교로 옮겨 동물학과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공부를 계속했다.
일본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독립운동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해외 독립운동 활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1920년 궐석재판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의경 선생도 머나먼 타국에서 망명과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유럽 내 요주의 한인’ 명단에 이의경 선생을 올려두고 감시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고향의 가족과 서신을 주고받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피압박민족회의가 열렸다.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하고 있던 이극로, 황우일 선생과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던 김법린 선생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을 조직해 참가했다. 이들은 회의 주최 측에 ‘첫째 시모노세키조약(1894년
청일전쟁 이후 체결된 조약)을 실행해 조선의 독립을 확보할 것, 둘째 조선 총독 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셋째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토의 의제로 제안했다. 또한 ‘한국의 문제’라는 자료를 제작해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하면서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이의경 선생은 이처럼 망명생활 중에도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학자 이의경에서 작가 이미륵으로 전환하다
이의경 선생은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플라나리아의 재생’에 대한 연구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받은 학위는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취득한 동물학 박사학위였지만 일제의 요시찰 인물인 그가 고국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또한 당시 독일 경제 상황으로 보아 외국인으로서 독일에서 직업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공을 살려 생활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이후 약 2년 동안 독일인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일본 유학생들의 논문을 번역하면서 생활했다. 이때 그는 동물학 박사
이의경에서 작가 이미륵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특히 이의경 선생이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저는 독일에서 몇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하다 자연과학과 철학으로 전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직업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활동이
더 절실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쓴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자연과학자로서의 삶보다 폭넓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작가로서의 삶을
염두에 두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어느 날 밤 골목길에서」를 시작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글과 습작을 독일의 문예지와 신문에 발표하면서 작가의 삶을 시작했다.
「한국인의 조상숭배」(1933), 「한국과 한국인」(1934) 등 초기 작품을 보면 순수문학이라기보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토속적인
풍습이나 이야기, 예절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점차 독일 문단에서 작가적 소질을 인정받게 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를 서구 유럽에 소개하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뮌헨 근교 그래펠핑에 살고 있던 자일러 교수 가족과
친분을 쌓고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생활에서도 안정을 찾고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1935년「수암과 미륵」이라는
제목의 자전소설 형식의 글을 발표할때 이의경이 아닌 이미륵으로 표기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이미륵’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책 「압록강은 흐른다」
「압록강은 흐른다」 독일어 초판본
(1946) [출처: 연합뉴스]
이미륵 선생은 1946년 뮌헨의 피퍼 출판사를 통해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이 책은 1900년대
초반부터 사촌 수암과 함께 보낸 소년 시절, 가정과 학교생활, 한국의 전통 교육과 근대식 교육, 일제의 침략과 탄압 정치,
3·1운동, 압록강 건너 조국을 떠나 상하이를 거쳐 유럽에 도착해 독일 생활이 시작되기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담은 것이다.
이 소설은 그해 독일에서 발간된 잡지에서 ‘올해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책은 외국인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그는
이미륵이다’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주목받았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지만, 이는 패전으로
지독한 상실감과 치명적 우울감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에게 평안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주었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고통과 허무의 기억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3·1운동 참여와 대한청년외교단, 대한적십자회 활동, 한국 대표단으로 세계피압박민족회의 참가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망명 생활 속에서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던 이미륵 선생이 목가적 자전소설을 발표한 것에 대해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초반 한국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독일 독자들에게 연대기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한국을
알리는 것보다는,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전통과 사상을 소재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인들에게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소개해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이미륵 선생의 작가적 판단이었다. 실제로 이미륵 선생은 독일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내적인 것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피딱지와 오물 딱지를 씻기는 게 의사라고 생각할 테지만, 내적인 것을 치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을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든다’라고 해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존재, 문학적 순수성을 통한 인간의 치유를
주장하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작가적 의도를 알았던 것인지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두루마기 차림의 이미륵 선생
(1936, 독일 그래펠핑)
[출처: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사진자료실]
독일과 한국에서 여전히 기억되는 이미륵
이미륵 선생은 장편소설 발표를 전후하여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난 독일 사회 분위기도 그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살고 있는 그래펠핑의 문인회 모임에서 매주 인문학 토론회를 가졌고, 독일작가협회 회원으로서 패전 이전
독일 문학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전후 독일 문학의 전망 등에 대해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1948년부터 그의 모교인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문학, 중국과 일본 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이미륵 선생은 1949년부터 몸에 이상을 느꼈다. 바쁜 일정에 떠밀려 제대로 쉬는 시간조차 낼 수 없었던 그는
건강이 더욱 악화했다. 그때 양아버지처럼 따르고 스승으로 존경하던 자일러 교수가 질환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그로 인한 슬픔이 그의 건강을 더 악화시킨 것인지 자일러 교수가 사망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미륵 선생도 위암으로
타계했다. 1950년 3월 20일이었다.
쿠르트 후버 거리에 설치된
이미륵 선생 동판 [출처: 연합뉴스]
51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이미륵 선생은 1965년 「압록강은 흐른다」가 대한민국에 번역 출간되면서 한국 사람들에게도 기억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1963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하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12월 건국훈장애족장, 2007년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해 그의 독립운동을 기렸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이미륵 선생이 살았던 독일 그래펠핑 시청 인근 쿠르트 후버 거리 입구에 그를 기념하는 동판이
설치되었다. 쿠르트 후버는 이미륵 선생의 스승이자 친구로 나치에 저항하는 백장미단을 후원하다 체포되어 1943년 처형된 뮌헨대학교
교수다. 선생은 후버 교수가 수감되었을 때뿐 아니라 그의 처형으로 가족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도 도움의 손길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었다.
후버 교수 동판 옆에 위치한 그의 동판에는 그가 즐겨 사용하던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 동산이 장미 동산이 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독일과 한국의 거리와 역사를 뛰어넘어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재생하고 기억하게 하고자 애쓴 휴머니스트로서의 이미륵 선생.
그의 묘비에는 그의 삶을 압축해 놓은 비문이 쓰여 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똑같이 존중받으며 비상한 재주로서 동서양 간
이해를 위한 가교를 세웠노라.”
이미륵 묘소(독일 그래펠핑시) [출처: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사진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