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철학을 나눈 두 친구와의 운명적 만남
최정숙 선생이 태어나던 해인 1902년은 대한제국이 저물어가고
근대적인 사고가 확산하던 시기였다. 선생은 초대 제주지방법원
법원장을 지낸 아버지 최원순(崔元淳)의 영향으로
근대적 학교인 신성여학교(요즘의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신성여학교는 프랑스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제주 최초의 여학교였다.
선생은 이 곳에서 1913년 세례를 받은 후 종교인이자 수도인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고, 이후 가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사랑과 헌신,
나눔과 정의 실현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최정숙 선생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친 세 가지를 꼽자면
아버지, 천주교 그리고 친구인 고수선(1898~1989)과 강평국(1900~1933)일
것이다.
고수선, 강평국은 그와 신념과 철학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가난한 이웃과 여성 그리고 민족을 위한 길을 같이 걸을
최고의 동반자를 얻은 것이다.
선생은 1914년 이 두 친구와 함께 신성여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보통학교는 4년제였다), 서울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남성 위주의 문화, 서울과 제주라는 먼 거리, 경제적
문제 등을 고려했을 때 선생의 유학 문제는 당연히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 어떤 반대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12·14·16세 이 어린 소녀들은 당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삶이 교육과 여성,
민족이라는 키워드로 점철된다는 사실이다. 세 사람의 유학길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조선 민족과 여성에게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여고)
사범과에서 다시 뭉쳤다.
경성여고는 오늘날 공립고등학교로, 4년제였다. 졸업 후 1년
과정의 사범과가 있었다.
제주 신성여학교 시절의 고수선 선생(왼쪽)이 강평국 선생(가운데)의 머리를 땋고 있고,
최정숙 선생(오른쪽)이 앉아서 장난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출처: 한겨레신문사]
억눌렸던 소녀들,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제사회에는 평화와
민족자결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웃한 러시아에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식민지국의 독립 활동을 지원한다는
선언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이 크게 자라났다.
경성여고는 조선총독부 소속 학교였기에 세 친구는
차별과 감시를 받으며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국제 정세와
서울 생활은 그들에게 불합리·불평등에 반기를 들게 했고
정의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 중 한 명인 기독교
중앙감리교 전도사 박희도 선생이 의식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비밀결사는 경성여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최정숙을 비롯한 고수선과
강평국은 단체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일 당일 만세 운동이 전개되자 교직원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자물쇠로 학교 문을 잠갔다. 그러자 고수선을
비롯한 몇몇 학생이 문을 부쉈고, 많은 학생이 학교 밖으로
나가 만세 운동 대열에 참여했다. 최정숙 선생은 79명에
이르는 동료들을 이끌고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당일 32명의 동료와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중 30명의
학생은 당일에 풀려났지만, 주동자였던 최정숙 선생은 풀려나지
못했고 유치장에 구금되어 닷새 동안 조사를 받아
야 했다. 모진 고문과 함께 조사가 이어졌고 3월 5일 서대문
형무소로 넘겨졌으며 3월 20일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3월 25일은
경성여고 졸업식 날이었지만, 차마 일본 국가를 부를
수 없었던 선생과 친구들은 졸업식 참석을 거부하고 제주로
내려갔다.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지치고 병든 몸을 치
료하며 제주 생활을 이어가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4월 15일에
다시 경성지방검사국에 소환되었다. 만세 운동이 진정되지
않자 주동자를 격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10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거의 매일 고문을 당했고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사상범으로 실형을 받았기에
수녀회에 몸담겠다던 꿈은 포기해야만 했는데, 이 사건은
선생이 훗날 종교인으로서 수도 생활 대신 현실 세계에서
수도인의 삶을 살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재학 시절
최정숙 선생(오른쪽 끝)
[출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e뉴스레터]
여성 인권과 교육을 삶의 중심에 두다
제주로 돌아온 선생은 강평국과 함께 오늘날 야학에 해당하는
‘여수원(女修園)’을 세워 여성 문맹 퇴치와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강평국이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하며 치열하게 싸웠다면, 최정숙 선생은 여성 인
권 향상과 민족을 위한 일꾼을 길러내는 교육에 집중했다.
여수원이 문을 열자 소문을 듣고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선생은
밤낮으로 교단에 섰고, 당시 여수원에서 공부하는 학생
수는 무려 200명이 넘었다.
선생은 강습소가 아니라 정식 학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남학생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명신학교를 열고, 여수원과 합쳤다. 명신학교
운영과 교육에 혼신의 힘을 쏟은 선생은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고문의 후유증도 한몫했다. 영영 교단에 설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건강 회복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도 교육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천주교로 인해 맺은 인연으로 1925년 3월 목포의
소화학원, 1932년 4월 전주 해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전주 해성학교 시절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짐작컨대
선생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교육 활동을 언제나 삶의
중심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본군은 명신학교를 제주공립보통학교로
흡수시켜버렸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식민지 교육을 가르쳤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크게 좌절했고,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여의전)에
입학한다. 민족과 여성을 위해 교육하고, 병들고 가난한 동포와 여성을
치료하는 일은 소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선생은 1943년 경성여의전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고, 그해 이화여자고등학교
위생감(보건교사)으로 활동했다. 고향의 가난한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1944년 제주로 돌아와 자신의 거처를 손본 뒤 그
자리에 정화의원을 열고, 가난하고 병든 도민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최정숙 선생, 만세운동으로 잡혀가 받은 판결문 원본에는 최정숙 선생의 이름이 선명하다 [출처: 우리문화신문]
제주에서 민족교육에 힘쓰는 최정숙 선생의 모습 [출처: 한겨레신문사]
현실의 치유는 병원, 미래의 치유는 교육
선생은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더욱 가난해졌고, 병원 운영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광복 후 극심한 경제적 불황, 이념 대립으로 제주 도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제주 땅에 희망을 심기 위해 애썼다.
1949년에는 사라진 모교인 신성여학교를 부활시키는 데 힘을 쏟았고,
그해 사립학교로 신성여자중학교를 설립했다. 한국전쟁으로
피란민들이 제주로 밀려 들어오자 그들의 치료와 교육에도
매진했다. 더불어 상급학교가 필요하게 되자 1954년 신성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일했다.
이 많은 일을 할 동안 그는 어떤 보수나 대가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나누느라 바빴다. 일평생 화두였던 여성,
교육, 구제를 끊임없이 실천한 것이다. 피란민과 빈민 구호의
노력은 교황청에 알려져 1955년 교황청으로부터 교육·사회·의료
사업 부문 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활동으로 선생에게는
더 큰 과제들이 부여되었다. 1958년부터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 지사장, 1963년에는 대한결핵협회
제주도지부장을 맡은 것이다.
1964년에는 도(道) 단위의 교육지자체가 실시되어 초대 제주
교육감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는 여성 교육감의 등장이 파격적인
인사였다. 교육감으로 4년간 재임하는 동안 여성 교육기관,
학급·학교 증설, 재일 교포와 유대 강화, 생산 교육 강화,
향토 학교 건설 등을 실행했으며, 이를 인정받아 1967년에는
제2회 5·16 민족상 교육 부문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7년,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최정숙 선생은
평생을 천주교 수도인처럼 살았다. 결혼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재산도
모으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과 교육에 관한 일이라면
욕심을 부렸고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이후 1993년 3·1절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으며, 2018년에는
아프리카 부룬디에 최정숙 선생의 이름을 딴 학교가 설립됐다.
제주의 ‘최정숙을 기리는 모임’이 한국희망재단과
협력해 후원금을 모으고 학교를 지은 것이다.
‘여성, 소외된 약자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최정숙 선생의
박애주의 정신이 낯선 땅 소녀들의 마음속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