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대면하는 가장 좋은 방식, 글쓰기
한동대학교 뉴턴홀 뒤편에는 이재영 교수가 판 연못이 있다. 연구실 밖 빈터에 온갖 생명이 깃드는 우물 하나 만들어 놓고, 계절이 오가는 것을 그는 기쁘게 보고 듣고 느낀다.
연구실 바깥에 ‘못’이 있다면, 연구실 안에는 ‘숲’이 있다. 바로 노트의 숲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무선 수첩부터 A4 크기의 스프링 노트까지, 이미 다 썼거나 아직 쓰고 있는
노트가 곳곳에 있다. 얼핏 어수선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질서정연하다. 그의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과 느낌, 그리고 깨달음이 각각의 노트 속에서 ‘따로 또 같이’ 꽃으로 피어난다.
덕분에 그의 연구실에는 그만의 봄날이 흐르고 있다.
“다 쓴 노트 몇 권을 묶으면 그게 그대로 책이 돼요. 손 글씨로 글을 쓴다는 건 ‘생각이 흐르는 대로’ 문장을 이어간다는 걸 뜻해요. 디지털기기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에요.”
그가 한 권의 책을 ‘뚝딱’ 쓸 수 있게 된 건 역설적으로 단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과학자의 길을 걷던 그는 1996년 한동대학교 기계제어
공학부 교수로 부임해 온 뒤 약 3년간 여러 일에 개입하며 과학자의 본분인 연구와 멀어졌다. 그러다 다시 시작하려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안과 우울과 절망이 차례로
밀려왔다. 자격 없는 교수라는 생각에 매일 밤 울며 잠들었다.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핀 5월 어느 날이었어요. 축제가 한창이던 그때 생을 마감할 결심을 하고, 아빠가 어떻게 살다가는 사람인지를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어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때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생의 첫 기억부터 써 내려가는데, 마치 손이 스스로 알아서 쓰는 것처럼 글이 마구 쏟아지더라고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면서,
사흘 밤낮 동안 A4 70페이지 분량의 글을 썼어요. 다 쓰고나니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몸이 아파왔죠.”
그는 한숨 자고 일어나 오일장에 갔다. 거기서 깻잎 팔던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봤다. 그 순간 위대하게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 일을 겪으면서 그는 믿게 됐다.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글쓰기’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글은 노트에 손으로 쓸 때 가장 크게 효능이 발휘된다는 것을. 홀린 듯이
글로 토해내고 훗날 다시 읽어보면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 진다. 치유도 성찰도 성장도 그 과정에서 이뤄진다.
자기만의 천재성을 열어주는 노트 쓰기 방법
“그때부터 글을 한꺼번에 몰아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어요. 생각의 흐름을 손이 바삐 따라가는 축복이 마침내 제게 온 거예요.”
노트 덕분에 죽다 살아난 그가 노트의 힘을 더욱 믿게 된 건 천재들의 공통점을 발견하면서다. 평소 ‘천재’에게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천재들의 ‘지속력’이 노트 쓰기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됐다. 다양한 직업군의 연사(演士)가 모여 각자의 생각을 설파하던 17세기 유럽의 살롱에는 저마다의 무기를 적은 ‘비망록’이 있었고, 과학 만능 시대였던 18~19세기 천재들
에게는 자기만의 탐구 과정을 기록한 ‘연구 노트’가 있었다. 천재란 무릇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인물인데, 천재와 시대 사이에 노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 「노트의 품격」 같은 저서가 그렇게 탄생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존 로크, 이마누엘 칸트, 오노레 드 발자크…. 하나같이 노트가 만들어낸 천재들이에요. 원래부터 천재가 아니라 노트 덕분에 천재가 된 겁니다. 노트 쓰기는 자기 안의 천재성을 끌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누구든 천재가 될 수 있어요.”
작은 노트에, 정자체로, 단숨에 써 내려가기
우리 안의 천재를 꺼내기 위한 노트 쓰기 팁으로 이재영 교수는 다음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정자체’로 쓰는 것이다. 생각이 폭주할수록 천천히 또박또박 써야 자신을 뛰어넘는 글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문장으로 글을 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주어와 술어가 분명한 ‘완성형 문장’으로 써야 훗날 글을 쓸 당시의 생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까닭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쓴 노트를 꼭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쓴 것을 다시 읽으면 그 위로 새로운 생각이 덧입혀진다고 그는 믿는다. 생각을 다시 생각하는 ‘메타인지’가 가능해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초월하면 천재가 된다. 노트 쓰기가 천재를 탄생시키는 비결이다.
“세 번째는 노트를 펴자마자 전체 글의 20%를 단숨에 쓰는 거예요. 멋진 몇 문장으로 멈추지 말고, 거친 문장을 쭉 이어서 써보는 겁니다. 글이 거칠수록 제대로 몰입했다는 증거예요. 대부분 천재는 노트의 처음 20%를 격정적으로 쓴 사람들이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그는 크기가 ‘작은’ 노트를 쓸 것을 권장한다. 조그만 수첩에 쓸수록 더 좁고 더 깊게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작은 노트의 장점은 그 외에도 많다. 한 권을 금방 채울 수 있어 성취감을 쉽게 느끼게 되고, 휴대하기 간편해 이동 중에도 언제든 생각을 기록할 수 있다. 집중력도 더 쉽게 생긴다. 작지만 큰 수첩에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숨 쉬는 셈이다.
미래 에너지를 연구하는 '파워엑스랩'의 제자들이 직접 작성한 노트를 들고 있다.
노트에서 발견하는 나만의 '우주', 기다리는 지혜
“노트 쓰기가 교육에도 접목되길 바라요. 학생들이 지닌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 보는데, 현재의 우리 교육은 기존의 지식을 ‘집어넣는’ 교육에 머물고 있어요. 가령 객관식 시험문제 안에는 답이 이미 존재하잖아요. 그중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게 과연 제대로 된 교육일까 싶어요. 해답은 글쓰기 교육에 있다고 믿어요. 글을 써보지 않으면 판단은 곧잘 해도 생각은 깊이 못 하는 사람이 돼버립니다.”
학생들의 문해력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을 그는 글쓰기 교육의 부재와도 연관 지어 생각한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이 노트에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기를…. 그 소망이 점점 커지는 이유다.
그는 소위 말하는 ‘융합형’ 인재다. 청소년기엔 백일장에서 몇 번 장원을 했고, 대학 시절에는 시 문학지에 시 두 편을 싣기도 했다. 한동대학교 기계제어공학부 교수와 포스코 석좌교수로 지내며 제자들과 미래 에너지 개발에 힘써 온 이후에도 산문집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말의 사람 글의 사람」과 SF 소설 「지적 거인」 등을 펴내며 이과와 문과의 양 날개로 세상과 소통해 왔다. 노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쑥스럽지만, 제가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근데 이게 요즘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부터 갑자기 수학을 잘하기 시작해, 뒤늦게 폭발적으로 두각을 드러냈거든요. 그러니 내신이 좋지 못했고, 학력고사와 본고사 덕에 운 좋게 합격할 수있었어요. 제 경우를 돌아보면, 우리 교육에서 학생들을 평가하는 방식이 너무 일차원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람은 저마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점이 달라요. 학생들이 잠재력을 스스로 꺼낼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아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이 그는 늘 궁금하다. 그러니 자꾸 노트를 든다. 고속열차를 타고 출장 갈 때도, 길을 걷거나 밥을 먹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메모한다. 자기다운 노트를 타고 자기만의 ‘우주’를 오늘도 유쾌하게 유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