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1945년 충북 괴산면의 가장 깊은 오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윤국진 교장은 어린 시절 배고픔보다도 배우지
못한 설움이 더 컸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상경을 결심하고 먼 친척을 찾아 인천으로 향한 것도 배움에
대한 배고픔 때문이었다.
새벽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로, 낮에는 구두닦이로, 밤에는 빵장수로 고생스럽게 일하면서도 ‘언젠가는
배우고 말리라’는 다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뒤늦게 야간 학부에 들어가 악착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것도
그 꿈을 이루고자 한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야간 학부를 다니면서 공부하는데, 가끔 반 친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아 찾아가 보면 밥도 못 먹고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쌀을 사는 데 보태주기도 했죠. 밥도 못 먹는
형편에 꿈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라고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청년 윤국진의 꿈은 한결같았다. 정당하게 돈을 벌어 학교를 세우고, 더 많은 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결혼 후 사업체를 운영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렇게 1984년
근로 청소년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9월 전 재산을 털어 남인천새마을여자실업고등학교의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문교부(現 교육부) 지정 학력 인정 사회 교육시설로 인가를 받았다. 1990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전과목 학력 인정을 받아 남인여자상업학교로 개명했고, 1999년부터는 제도권 교육에서
멀어진 청소년을 위해 미용예술과 3학급을 신설하면서 남인천고등학교로 확장했다.
미용, 조리, 컴퓨터 등의 기능 수업을 개설하고 청소년들의 진로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인천 최초로
만학도를 위한 중고등학교 과정을 개설해 학력 인정까지 받는 평생학교로 성장시켰다. 덕분에 늦게나마
배움의 기쁨을 누리며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만학도들이 학교로 모여들었다.
인천 최초이자 유일의 학력 인정 평생학교인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의 면면도 화려하다. 인천 지역
구의원과 시의원은 물론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대학에 출강하는 졸업생도 있다. 정치계와 학계,
금융계, 연예계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졸업생들을 보면 그동안의 노력을
보답받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배움에 대한 열의는 나이에 제한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다들 배우기가 어려웠으니까요. 특히 다른
형제에게 배움의 기회를 양보하고 집안을 위해 희생하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입학생들에게
제가 예전에 고생하며 공부한 이야기를 꼭 들려줍니다.”
새로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윤국진 교장은 “즐겁게 학교에 다니라”고 강조한다. 설령 교과과정이
어렵고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즐거운 마음으로 매일 학교를 오가다 보면 절로 눈이 트이고
아는 것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까닭이다.
“학생들에게 일등 하려고 하지 말고 학교를 놀이터처럼 생각하라고 말하곤 합니다. 대신 결석은 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래서 학교 휴게실을 더욱 신경 써서 만들었어요.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으려고 애쓰기보다
학교에 와서 동급생과 선후배도 만나고 자기 주도적으로 배움을 실행해 갈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일까. ‘공부’를 강조하지 않아도 졸업생들은 자발적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기준 대학
진학률도 50%에 가깝다.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를 지키고 가꿔온 그의 헌신은 제13회 대한민국
스승상 근정포장으로 돌아왔다. 2018년 대한민국 국민포장 등 교육과 사회복지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상을 수상한 그이지만,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받는 이번 상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진다. 학생이 단 한 명만 있을지라도 학교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바람을 실천하기 위해 윤국진 교장의 열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