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제공처: 독립기념관 | 자료: 공훈전자사료관 기준
*사진 제공처: 독립기념관 | 자료: 공훈전자사료관 기준
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제공처: 독립기념관 | 자료: 공훈전자사료관 기준
*사진 제공처: 독립기념관 | 자료: 공훈전자사료관 기준
정정화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안주인이었습니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 중 정정화 선생이 지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임시정부의 모든 살림이 선생의 손끝에서
이뤄졌습니다. 물론 그가 안살림만 도맡은 것은 아닙니다. 임시정부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섯 번이나
국내에 잠입하는 등 위험한 임무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 총상을 입은 김구를 간호하고 이동녕의 임종을
지켰으며, 임시정부가 설립한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전천후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정정화 선생은 1900년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910년 어린 나이에 김의한(金毅漢)과
결혼했는데, 김의한은 대동단* 총재를 지낸 김가진(金嘉鎭)의 아들이었습니다.
정정화 선생은 개화파 집안에서 성장한 남편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세상 물정과 민족의식에 눈을 떴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정정화 선생도 그들의 뒤를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습니다. 열흘이 넘게 걸리는 험난한 여정을 견디며 어렵사리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정정화 선생은 다시 국내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가 덜할
것이라는 점을 이용해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상하이에서 서울까지 왕복하는 길은 그 자체로도 멀고 험했지만, 무엇보다 적지 않은 돈을 몸에 숨겨
국경을 넘나들어야 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임무였습니다. 압록강 철교 위에서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끌려간 적도 있습니다. 이틀 동안 심문받은 끝에 신분이 탄로 나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조사만 받고 풀려났지만, 정정화 선생은 이후에도 아슬아슬한 밀사 역할을 10여 년간 계속했습니다.
* 대동단(大同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
▲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 정정화 선생의 가족
▲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 정정화 선생의 가족
중국에 거점을 둔 임시정부는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1932년에 일어난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로 이전까지 임시정부를 보호하던 프랑스 조계* 당국이 더 이상 독립운동가를 보호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도 그 일화 중 하나입니다. 그 일로 정정화 선생도 임시정부를 따라 상하이를 떠나야 했습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정정화 선생은 1938년 2월 후난성(湖南省)에서 다시 임시정부와
만났습니다. 이때부터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와 함께 다니며 본격적으로 안살림을 도맡았습니다.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 훈련부 주임이 되어 활동했는데,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무력 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임시정부에 차린 3·1유치원에서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로도 근무한 정정화 선생은
아이들에게 “조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는
말로 아이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조계: 19세기 후반, 영국·미국·일본 등 8개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근거지로 삼은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
▲ 3.1유치원 추계 개학 기념(뒷줄 오른쪽 끝)
▲ 기흥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 상해 임시정부의 여인들(앞줄 오른쪽 두 번째)
▲ 3.1유치원 추계 개학 기념(뒷줄 오른쪽 끝)
▲ 기흥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 상해 임시정부의 여인들(앞줄 오른쪽 두 번째)
한국혁명여성동맹 간사와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은 방송에서
국내외 여성들의 각성과 협력을 촉구하는 한편, 위문 금품을 거두어 독립군에게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멀리는 미주 한국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 속에 재미 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촉구하였습니다.
정정화 선생은 충칭(重慶)시 인근에서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충칭과
상하이를 거쳐 돌아왔지만, 그는 이듬해 5월에야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활동한 사람들은 흩어졌고, 이후 남편은 6·25전쟁 중 납북되었습니다.
이 일로 정정화 선생은 갖은 고초를 치러야 했습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는 뒤늦게 정정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는 1987년에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녹두꽃』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임시정부의 안주인’,
‘임시정부의 어머니’라는 평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담하게 밝혔습니다.
“내가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해 항일 투사들과 생사존몰(生死存沒)을 같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지치지 않는 용기와 지혜로 독립운동에 충실했던 정정화 선생은,
1991년 세상을 떠나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