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방과후 집으로 가는 길엔 언제나 달고나 아저씨가 계셨다. 여기저기 긁힌 그을린 국자에 설탕 두 스푼과
베이킹소다 한 스푼을 넣고 순식간에 불에 달구면 부풀어 오르는 그 팽창력에 한 번 놀라고, 설탕보다 더 달아서 이름
붙은 ‘달고나’의 맛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렇게 달고나는 학창 시절 우리 일상의 필수품이었고, 영원한 간식이었다.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던 달고나에 대한 중년의 기억은 어느새 뚝 끊겼다. 새로운 간식거리와 복잡한 신문물의
도입으로 과거의 우리 ‘이웃’들은 금세 자취를 감춰버렸다.
‘오징어게임’ 앙상블 포스터와 오징어게임 스틸컷[사진 제공_넷플릭스]
추억을 재빠르게 재생시킨 건 OTT(Over the top,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까맣게
잊고 있던 달고나가 기억 속에 재등장했고, 중년의 미각과 후각이 다시 꿈틀거렸다. 10대나 20대가 된 자식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중년에겐 과거의 부흥이지만, 자식들에겐 새로운 세계였기 때문.
추억과의 재회는 신구 세대 모두에게 축복이다. 구세대는 단순히 아름다운 과거의 순간을 반복 재생하는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신세대와 소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한편 신세대는 ‘노땅’이나 ‘꼰대’ 정도로 취급하던 구세대의 알찬 정보와 흥미 가득한 경험에 탄복한다. 신구 세대를
이어주는 끈은 모두 과거의 콘텐츠에서 나오는 셈이다.
구세대에겐 레트로(retro, 복고)이고, 신세대에겐 뉴트로(new-tro,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인 콘텐츠가 ‘콘고지신’
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콘고지신은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의
사자성어 온고지신(溫故知新)에 영어 단어 콘텐츠(contents)를 합쳐 만든 신조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23년
콘텐츠산업을 전망하면서 제시한 열 가지 키워드 중 하나다.
레트로나 뉴트로는 어느 시점까지 과거로 봐야 할지 불분명하지만, 콘고지신은 대략 20, 30년 전후의 콘텐츠를 압축적으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1990년대 전후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콘고지신의 줄기를 이룬다.
너무 과거로 돌아가면 괴리감이 커 신세대에게 되레 거부감을 줄 수 있고, 지금 시대와 가까우면 최근 콘텐츠와 유사해
식상해 보일 수 있다. 20, 30년 전 콘텐츠는 촌스럽지만 극복할 정도인 데다 스토리는 더 감동적이고 깊이가 있어 묘한 신선함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콘고지신 콘텐츠는 무조건 옛것이라고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 ‘성공’ 이력이 있어야 한다. 중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검증 상품이 신세대의 시험대에 올라
재평가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구세대는 이미 잊었지만 오래전 좋아했던 콘텐츠에
다시 흥분하는 셈이고, 신세대는 몰랐지만 좋아할 가능성이 큰 콘텐츠를 쉽게 수용하는 것이니 비즈니스 모델로 이만큼 어울리는 상품이 없는 것이다.
슬램덩크 등장인물[사진 제공-NEW]
「슬램덩크」는 1990년대 1억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만화다. 그 정점의 인기를 맛보고는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는데,
최근 26년 만에 애니메이션 영화로 되살아났다. 과거 콘텐츠인 만큼 흥행 기대감이 크지 않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올해 1월 4일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애니메이션은 개봉 2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스크린 수가 많지 않았음에도 팬들의 폭발적 지지로 얻은 성과여서 더욱 값졌다.
여세를 몰아 출판 시장도 들썩였다. 곳것의 서점에서 「슬램덩크」 특별판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찍는가 하면, 만화 부문
1~20위 모두 「슬램덩크」가 차지하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1998년 개봉 당시 전 세계 역대 흥행 1위에 올랐던 영화 ‘타이타닉’도
올해 25년 만에 재개봉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못지않은 인기가 중장년 세대와 신세대의 예매율을 통해 두루 증명됐다.
영화 ‘중경삼림’(1995), ‘매트릭스’(1999) 등 20, 30년 전 콘텐츠도 새로 단장하면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서사의 진의가 ‘뜨겁게’ 또는 ‘새롭게’ 읽히고 증명되면서 콘텐츠의 소비 영역도 확대되고 있다. 1996년 게임으로 먼저
출시돼 큰 인기를 모은 ‘포켓몬스터’는 국립극장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변주됐고,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오는
12월 뮤지컬로 각색돼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막을 올린다.
2000년 등장해 당시 ‘엽기토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진 토끼 캐릭터 ‘마시마로’는 올해 토끼해를 맞아 기업들과
새로운 협업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오비맥주는 밀 맥주 브랜드 ‘카스 화이트’ 판촉 행사의 일환으로
마시마로 한정판 굿즈를 출시했고, 이랜드가 운영하는 SPA 브랜드 스파오도 마시마로와 협업 상품을 내놓았다. 3040세대에겐 ‘엽기’로, 1020 세대에겐
‘애착’으로 투영되는 마시마로의 다층적 개 성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콘고지신은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성공의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2000년대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가 가진 ‘무한 흡수력’이다.
이들은 어느 하나의 플랫폼이나 어느 하나의 장르에 묶인 시스템과 거리가 먼 세대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을 모국어처럼 이해하는 이들은 어떤 콘텐츠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특히 각종 OTT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여러 콘텐츠를 동시에 경험하며 장단점을 금세 파악하는 흡수력은 앞선 어느 세대보다 강력하다. 지금 유행
하는 콘텐츠에 실시간 반응하면서 20, 30년 시간을 거스르는 콘텐츠에도 쉽게 눈을 뜬다는 얘기다.
나머지 하나는 상상만으로 있을 법한 새로운 소재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변동성’이다. 좀비, 우주, 괴생명체 같은
소재가 한동안 중요한 콘텐츠 제작의 원동력으로 평가받았지만, 내실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서사에 동요하지
않는 것은 지금 세대가 보여주는 냉철한 특징 중 하나다. 기성세대가 이미 환호한 의미 있는 서사에 대체로 젊은 세대가
공감하는 것도 시대가 달라도 감동과 재미 포인트는 변함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 셈이다.
공들인 콘텐츠의 유효기간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20년, 200년 먹거리를 위해 콘고지신의 의미와 역할이
계속되는 이유다.
Pokemon the Orchestra 신화의 땅에서[출처-국립극장]
베르사유의 장미 뮤지컬[EMK뮤지컬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