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의 요지, 천안삼거리와 아우내 장터
아우내 장터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사무소 주위에서 매월 1일과 6일에 열리는 전통시장이다. 지금은 ‘병천순대거리’로 유명한 곳이다. ‘병천순대’는 1960년대 병천면에 햄 공장이 들어서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아우내 장터가 전국에 알려진 계기는 유관순 열사가 주도하여 일어난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 독립 만세운동인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천안관광지도의 천안삼거리
[출처: 천안시청 홈페이지]
천안은 중부지방 교통의 요지로 조선 중기 이후 시장이 많이 개설된 곳이다.
특히 ‘천안삼거리’로 유명한데 북쪽으로는 서울, 남쪽으로는 대전·대구·부산, 서쪽으로는 공주·광주·목포 방향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이다.
예부터 천안을 중심으로 천안장(3·8일), 풍세장(4·9일), 병천장(1·6일), 이동장(4·9일), 성환장(1·6일) 등이 개설되었다. 병천장, 이동장, 성환장은 지금까지도 ‘5일 장’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병천(竝川)은 복구정천과 산방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시내〔川〕’를 ‘아우른다〔竝〕’는 데서 유래하여 예부터 ‘아우내’ 라고 불렀다.
아우내는 청주·진천·조치원·천안 등과 연결되는 요지에 위치하여 18세기 중반부터 시장이 개설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민족의 역사를 바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지금부터 103년 전인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의 아우내 장터. 이곳에서 마을 주민부터 물건을 팔러 온 장사꾼까지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홍일선, 김교선, 이백하 선생을 중심으로 한 수신·성남면 계열과 조인원, 유중권, 유관순을 중심으로 한 동면 계열이 결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확산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 만세운동이다.
수신·성남면 계열의 만세운동은 홍일선의 발의와 김교선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5일 장이 서는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를 것을 합의하고 같은 지역의 한동규, 이순구, 이백하 선생과 함께 준비하였다.
동면 계열의 독립운동은 유관순이 서울 이화학당에 재학 중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내려와 같은 동네 어른이자 감리교 동면 속회장이었던 조인원,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등에 보이고 서울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시작하였다.
이들도 아우내장이 열리는 4월 1일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유관순은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나 3월 10일 조선총독부가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리자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귀향하였다.
이들은 아우내 장터에 오는 사람들에게 동참하기를 권유하려고 천안·수신면·진천 방면 등의 길목에 사람을 배치하였다.
밤에는 예배당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에는 아우내 장터를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진천 고갯마루에서 다음날 거사를 알리는 봉화를 올리기도 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기념 동상 ‘그날의 함성’
[출처: 오마이뉴스]
4월 1일, 홍일선과 김교선, 이백하 선생 일행은 사전에 준비한 대로 장터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였고, 장터를 떠나는 사람들에게도 되돌아와 줄 것을 부탁하였다.
오후 1시가 되자 태극기를 든 조인원이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장터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독립 만세운동의 선봉에 선 교육자, 이백하 선생
포암(逋巖) 이백하(李栢夏) 선생은 1899년 4월 17일 천안군 성남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 교육은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조부 이상수와 서당을 운영하던 부친을 따라 한문과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10여 세에 한시를 지었을 만큼 문장력을 타고나 시도 수십 편을 창작했고, 역사학에도 관심이 많아 동양사와 한국사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팔만대장경』을 해독할 정도로 불교학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오송보통학교 교사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성남면 유림 대표 자격으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포암 이백하 선생
「교육자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포암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사상」 [출처:『열린충남』 94권. 2021]
이백하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지역 실정에 맞는 내용으로 한글로 초안을 잡아, 알기 쉽게 작성하였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가 서울에서 은밀하게 가져온 독립선언서가 너무 길고 한자투성이로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백하 선생의 외아들인 이은창씨가 1977년 1월 국가 보훈처에 제출한 ‘항일독립투사 이백하 옹의 공적서’에 나온 기록이지만 아직 원본이 발견되지않아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열을 지어 큰 깃발을 선두로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장터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헌병 주재소가 있었다. 헌병들은 만세 소리에 놀라 장터로 출동하였고 사람들에게 기총을 난사하였다.
이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을 비롯하여 19명이 사망하였고, 3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시신을 헌병 주재소로 옮기고 항의하였다.
김교선은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었고, 한동규는 헌병보조원이 강탈해 갔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았다. 이백하 선생은 “죽은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여라.
구금자를 석방하라”라며 주재소장에게 강하게 항의하였다. 주재소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만세운동이 격화되자 헌병대는 발포와 함께 무력 진압을 시도하였다.
생명의 위협과 체포를 피해 해산한 사람들은 천안·병천 간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신주를 무너뜨렸다. 또 갈전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부근에서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이후에도 만세운동을 계획하다 체포되어 공주지법과 경성고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백하 선생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조선 민족으로 정의와 인도에 기초하여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이를 범죄로 보고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복종할 수 없다”며 상고이유서를 작성하면서 저항하였다.
이때 조인원, 유관순 등은 3년, 김교선, 이백하 선생 등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대정 8년(1919년) 제172호 이백하 선생 판결문. 우측 3번째 “(충청남도 천안군)동군 성남면 신덕리 농업 이백하 21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독립운동사자료집5 삼일운동 재판기록]
이백하 선생은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났다. 해방 이후에는 충청북도의 충주중학교, 청주여자중학교, 청주고등학교 등에서 국어와 한문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청주고등학교 교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6·25전쟁 때도 피난을 가지 않고
홀로 남아 학교를 지켰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겪은 항일 독립 만세운동 체험담을 들러주는 등 교단에서도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 나갔다. 정부는 일평생 항일 만세운동과 초중등 교육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1994년 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포암 이백하 선생이 청주고 재직시절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국어 수업을 하는 모습
[출처: 중도일보]
수많은 유관순, 이백하가 만든 독립운동
3·1절 기념 봉화제. 매년 2월 마지막 날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기념하며 열리고 있다.
[출처: 굿모닝충청]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 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이놈들아! 나도 죽여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사람들을 이끌다 순국한 김구응과 함께 순국한 어머니 최정철의 묘비석에 있는 글이다.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과 달리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사람들을 이끌었던 주도자들이 많았고 참가자도 많았다.
아우내 장터에 3천 명이 넘는 사람이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유관순 열사와 이백하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빼앗긴 국가와 억압받는 민족에 대한 해방 의식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아우내 장터가 있는 천안시 동남구의 세성산은 1894년 공주 우금치 전투의 전초전이었던 세성산 전투가 있던 곳이다. 이 지역은 특히 동학 세력이 컸던 곳이다.
또 영호남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지역보다 새로운 문물을 접하기 쉬웠고 당시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도 했다.
유관순을 비롯한 동면 계열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태극기를 만들던 곳은 개신교 매봉교회였다. 만세운동 당일 깃발을 들고 군중을 이끌던 김구응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의 교사였다.
진명학교에는 당시 15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는데 근대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 이백하, 김교신 등 20대의 젊은이들이 수신·성남면 계열의 주도자로 활동한 것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새로운 문물과 근대 의식을 접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이 모여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대전현충원 이백하 선생의 묘소
[출처: 『열린충남』 94권. 2021]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서 유관순 열사 한 사람이 크게 부각된 것은 천안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정치인으로 활약한 조병옥의 영향이 크다.
조병옥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의 주도자 중 하나였던 조인원의 아들이다. 그는 해방 이후 정부의 정통성과 민족의 구심점 찾기에 고심하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전개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떠올렸다.
게다가 자신보다 어린 나이의 여성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시위 중 부모를 모두 잃었으며, 자신마저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에게 주목했던 것이다.
이제는 더 많은 유관순과 이백하를 기억하고 찾아야 할 것이다. 올레길과 둘레길, 성지순례 길이 있는 것처럼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역사 순례길’을 조성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각 지역에 아직 찾지 못한 또 다른 유관순과 이백하를 발굴하고 기념하는 것은 역사를 성찰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