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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학계 등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이들의 발자취

역사 한 스푼

한글 자판 연구의 선구자

공병우 안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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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박사 공병우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릅니다. 그는 국내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 국내 최초의 안과 전문 병원인 ‘공안과’를 개원했습니다. 또 한글로 이루어진 시력 검사표를 처음 만든 사람도, 국내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집도하고 콘택트렌즈를 처음 국내에 도입한 사람도 공병우 박사입니다. 그가 최초로 이룬 업적은 안과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국내 최초 세벌식 한글 타자기 개발도 그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사진 및 자료 제공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일제강점기, 한글의 가치에 눈뜨다

1907년에 태어난 공병우 박사는 20세에 평양의학강습소를 수료하고 조선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국내 최초의 안과 의사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는 1936년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안국동 작은 벽돌집에 안과 전문 의원인 공안과의원을 열었습니다.
공병우 박사는 안과 분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눈물결핍 환자의 진단과 치료에 큰 관심을 가진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의학계에 공씨 플루오레세인(Fluorescein) 진단법을 소개했고, ‘뿌리형 비루관’이라고 부르는 눈물 치료용 비루관을 발명해 많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었습니다. 또 남보다 앞서 백내장 수술 후 안구에 인공수정체를 삽입했고, 여러 레이저 장비를 도입해 임상에 적용하며 국내 안과학계 발전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안과 의사 공병우 박사가 한글 활용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말, 한글 사용 탄압이 심해졌을 때입니다. 그에게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일깨워 준 사람은 국어학자 이극로입니다. 1989년에 펴낸 공병우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는 이극로와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어느 날 허름한 양복을 입은 중년 신사 한 분이 들어왔다. 치료를 받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우리글에 대해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의사 검정시험에 필요한 일본어만 공부했지 언문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이극로는 ‘언문이란 글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글인데 일본 놈들이 이 글을 못 쓰도록 탄압하고 있죠. 아니 일본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들까지도 제 나라 글자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죠. 한술 더 떠서 아예 한글을 글자가 아닌 양 무시하는 식자(識者)도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글에 대한 그의 애정은 종교적 신앙처럼 뜨거웠다. 눈을 치료받으러 와서 한글에 대해 까막눈이던 내 눈을 뜨게 하고 민족 문화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시력을 바로 잡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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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상을 수상한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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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박사의 벽동군 고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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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상을 수상한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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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박사의 벽동군 고향집

최초의 한글 타자기, 역사를 기록하다

강압적인 창씨개명 정책이 실시되자 공병우 박사는 스스로 ‘금일 공병우 사망’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일본어 의학 서적 『신소안과학(新小眼科學)』을 번역하면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는 그가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재를 털어 한글 타자기 개발에 힘쓰던 공병우 박사는 1949년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처음으로 발명했습니다. 세벌식 자판은 한글 낱자를 초성·중성·종성 각 한 벌씩으로 나누고, 벌이 다른 낱자는 글쇠 자리와 입력 방법을 서로 다르게 넣게 만든 한글 자판입니다.
6·25전쟁 때 서울이 점령되자,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사건*에 연루된 공병우 박사는 인민군에 체포되었다가 타자기 덕분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공병우 박사가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 인민군이 박사를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목숨을 건진 공병우 박사는 북으로 끌려갔고, 인민군은 타자기 설계도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끝나자 공병우 박사는 설계도를 들고 남쪽으로 탈출했고, 이후 한글 기계화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했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한국어 문서는 주로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되었고, 정전협정문 역시 이 타자기로 쓰였습니다. 이때 다른 나라 타자기보다 속도가 빨라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공병우 박사는 한글 세벌식 자판 연구 및 보급, 한글 기계화, 자판 통일 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컴퓨터가 보급되자 여든이 넘은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공병우 최종’이라는 별칭이 붙은 컴퓨터용 자판을 개발했습니다. 별칭이 붙은 이유는 공병우 박사가 직접 개발한 마지막 자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벌식 자판의 ‘최종판’은 아니었습니다. 1995년 공병우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뒤를 이어 자판 개발자들이 계속해서 세벌식 자판 개선에 힘썼고,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서 널리 쓰이는 국산 워드 프로세스 ‘아래아한글’도 공병우 자판의 영향을 받아 개발된 것입니다.
* 조선정판사사건: 1945년 조선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 발행 혐의로 재판받은 사건
** 출처: 『털어놓고 하는 말』 1978, 뿌리깊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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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과 의원 직원들과 공병우 박사(뒷 줄 왼쪽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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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아를 진료하는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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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과 의원 직원들과 공병우 박사(뒷 줄 왼쪽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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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아를 진료하는 공병우 박사

아낌없이 주고 떠난 공병우 박사

공병우 박사는 ‘시간은 생명이다’라는 좌우명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자판 개발에 힘쓴 것도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1950년대 집 구조를 서양식으로 바꿔 화장실을 집 안에 들였습니다. 화장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여기던 당시 이웃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1995년 공병우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PC통신 게시판은 그에 대한 애도의 글로 넘쳐났습니다. 이를 보고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한 기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병우 박사 본인은 다음과 같은 유언으로 조용한 장례를 당부했습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케이 로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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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문화원에서 연구중인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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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열린 ‘한글기계화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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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문화원에서 연구중인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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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열린 ‘한글기계화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