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l 영상 이한솔
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l 영상 이한솔
인공지능 시대의 문이 열리면서 배움의 방식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배우고
역량을 키워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통계학에 바탕을 둔 기계학습 분야에서 교육과 연구를
이어온 데이터 과학자(Data Scientist) 허명회 교수 역시 변화하는 시대 가운데 ‘학습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며 학습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기계학습의 산물인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지구에 두 학습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기계와 역할 분담을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제 인간도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발해야 할 단계가 온 것입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기계와 인간의 지능 대결이 가속화하고 있다. 꾸준히 축적되는 데이터에 힘입어
학습 능력을 키워가는 기계의 발전은 놀라운 수준이다. 데이터 과학자인 그도 기계학습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많다. 이 때문에 그는 “기계와 차별화된 인간 고유의 강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학습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집중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과 달리, 쉬지 않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기계와
경쟁하는 것은 애초에 승산이 없는 게임이다.
“개인적으로 ‘인공지능’보다 ‘기계지능’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기계지능은 무한 사례에서 추출한
지식을 활용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문제 풀이나 업무를 실행할 때는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합니다. 인간은
반복에는 약하지만, 직관력과 통찰력 등의 강점을 지녔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결정하는 일은 인간이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 입시에 치중된
우리나라의 교육 방식에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성큼 다가왔지만 한국 학생들의 학습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문제 풀이에 전력을
다하면서 높은 점수를 내는 데 치중된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으로는 기계와 경쟁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만의 경쟁력을 키워가기 어렵다.
“데이터 과학자로서 교육과 연구를 하면서 나름대로 확신을 얻은 기계학습의 원리가 있습니다. 몇 가지는 인간
학습에도 참고할 수 있어요. 그중 하나는 ‘과도학습(over-training)의 폐해’입니다.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학습은 애써 헛고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교육이 주도하는 과도학습이 대학 입시에서 반짝 효과를
보기 때문에 성장기 청소년들을 무의미한 훈련에 몰아넣는 일이 많아요.”
청소년 시절에 과도학습에 노출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 학습 동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본
개념을 깊이 고민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문제를 푸는 데 여전히 치중하는 경향도 크다. 하지만 이런 학습 방식은
기계에 더 적합하다. 생성형 AI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기계에 학습을 의존하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모든
과정을 기계에 의탁하는 것은 위험하다.
“내비게이션이 보편화되면서 운전할 때나 길을 찾을 때 내비게이션에 의존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지리 감각은 점차 둔화했습니다. 인공지능 도구를 활용해 학습할 때도 기본 내용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육의 나쁜 점으로 암기를 꼽지만 기억 자체는 학습에 아주 큰 도움을 줍니다. 기억 속 지식을 서로
연결할 수 있고,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학습에 대해 허명회 교수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천천히, 그러나 깊게’다. 이와 함께
독창성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으라고 권한다.
“저는 창의력보다 탐구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를 접했을 때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어느 정도
범위를 좁힌 후에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데 인간의 강점이 있거든요. 그 가운데 창의성도 생기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음식에도 패스트푸드와 슬로푸드가 있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재료부터 다듬고 조리해
천천히 먹는 슬로푸드처럼, 생각하기에도 ‘슬로싱킹(slow thinking)’이 있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강점이라고 봅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 일은 앞으로 기계가 할 테니까요.”
그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교육의 기본으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기’를 꼽는다. 이러한 능력을
키우려면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이 같은 환경 조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거실에 TV와 소파를 두기보다
커다란 테이블과 칠판을 둔다면, 가족이 함께 소통하며 지적으로 성장하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오랜 기간 강단에 섰던 그의 집 거실에도 항상 칠판이 놓여 있었다.
“아이의 성장기에는 가정이 맡아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하교해 집에 왔을 때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서 인상 깊거나 흥미를 느낀 내용이 있는지 대화하며 설명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가정에
칠판을 하나씩 두자고 이야기합니다. 작은 칠판을 두고 가족 구성원들이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소통 능력도
키울 수 있고요.”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대로 허명회 교수의 아들은 수학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프린스턴대학교 교수다. 그는 아들의 성취와 자신 사이에 분명히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세세한 개입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려고 하면 자신의 욕심이 투영되기 쉽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해요. 저는 미래 세대가 배우는 과정의 기쁨을 충분히 느끼면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경험한 것을 무한히 축적하는 도구인 인공지능과 달리, 인간은 지식의 범주를 개척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자면 남보다 앞서기 위해 경쟁하기보다 협업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려면 구성원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옆집 아이가
하니까 우리 아이도 해야 한다’며 조급해 하기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찾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