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장 | 사진 출처 넷플릭스
글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장 | 사진 출처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는 맛 하나는 최고로 인정받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 셰프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백수저’
셰프에게 도전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최종 우승 상금은 3억 원. 80명의 흑수저 셰프 중 예선에서
20명을 선발하고, 이들이 백수저 셰프 20명과 승부를 겨룬다. 승부의 기준은 오직 ‘맛’이다.
1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흑백요리사’는 공개 첫날 흥행에 성공했다. 공개 첫 주에는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비영어 TV 부문에서 1위에 올랐고, 이후 3주 연속 글로벌 1위를 차지했다. K-서바이벌 예능이 3주
연속 글로벌 1위를 기록한 것은 ‘흑백요리사’가 처음이다.* 또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유행어가 탄생했다.
그중 안성재 셰프의 “고기가 이븐(even)하게 익지 않았어요”라는 말은 지금도 유행어로 회자된다.
‘흑백요리사’는 여러 면에서 기존 요리 예능과 차별된다. 흑과 백의 간결한 색감, 빠른 속도감의 편집, 마치
계급 전쟁처럼 흑수저와 백수저로 나누어 경쟁을 펼치는 포맷은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출처: 넷플릭스 보도 자료(2024. 10. 24.)
서바이벌 예능의 핵심은 공정성이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불공정하다면 콘텐츠의 가치가 떨어진다.
‘흑백요리사’는 과정의 공정성을 극대화하며 다양한 경연을 통해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요리의
서사와 플레이팅을 즐길 수 있는 흑수저 결정전, 흑수저와 백수저의 일대일 대결이 펼쳐지는 흑백
대전, 백수저 11명과 흑수저 11명이 맞붙는 팀전, 편의점 재료로만 요리를 만드는 패자 부활전, 자신의
인생을 담은 ‘인생을 요리하라’, 두부 한 가지 재료로 30분마다 계속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무한 요리 지옥’ 등 각 라운드는 예측하기 힘든 규칙으로 긴장감을 더했다.
이처럼 균형을 잃지 않는 경쟁은
예측 불가능성을 높여 콘텐츠의 재미를 이어갔다.
심사의 공정성에는 더욱 신경을 썼다. 명성만을 기준으로 보면 백수저와 흑수저는 공정한 대결을 하기
어려운 구도다. 흑수저는 동네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 구독자가 많은 요리 유튜버, 15년간 학생들에게
급식을 제공한 조리사, 아직 배우고 있는 젊은 셰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백수저는 국내외 유명 요리 대회 수상자, 대한민국 조리 명장, 대형 업장의 총괄 셰프 등 경력이
화려한 인물들이다. 다른 요리 경연이었다면 심사위원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음식의
대가들이다. 흑수저의 롤 모델인 이들과의 대결에서는 심사에 선입견이 개입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바로 블라인드 테스트다. 심사위원들은 안대로 눈을 가린 뒤 음식을 맛보며
백수저의 후광 효과가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했다.
심사위원은 ‘흑’과 ‘백’을 명확히 구분했다. 백종원과 안성재 두 심사위원의 스타일은 각기 다르다.
수많은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외식업계의 거물인 백종원 심사위원은 요리의 대중성과 직관성을
중시했고, 미쉐린 가이드 3스타를 받은 파인 다이닝의 대표 주자인 안성재 심사위원은 요리의
섬세함과 서사에 중점을 두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두 심사위원을 배치함으로써 파인
다이닝의 화려함이 집밥의 매력을 압도하는 것을 방지했다. “전부 다 화려하고 고급 요리고… 나는
너무 평범해서 걱정된다”던 참가자의 우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사라졌다.
최종 승자가 결정되었지만, 승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100개 레스토랑을 모두 맛보는 ‘도장 깨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참가자들의 식당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새로운 맛집을 탐색하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를 잘 충족시킨 결과다.
서바이벌 예능은 경쟁을 중심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경쟁에서 이긴 자의 희열을 대리만족하려는
심리와 반대로 졌을 때 느끼는 고통을 엿보려는 욕망이 예능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서바이벌 예능은 점차 자극적이고 감각적으로 변하고 있다.
‘흑백요리사’가 흑수저와 백수저로 나누어 계급 전쟁을 벌인 콘셉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 서바이벌 예능이 다른 분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경쟁을 강요받는 한국 사회의 피로감을
반영한 결과일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비임금근로자는 약 658만 명**으로 취업자의 19.8%를 차지한다. ‘B(Birth, 출생)와
D(Death, 죽음) 사이에 C(Chicken, 치킨)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치킨 가게들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기 침체가 길어질수록 요식업의 사업장별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살아남기
위해 개성 강한 조리사와 셰프들이 등장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흑백요리사’ 시즌 2는 2025년에 제작될 예정이다. 시즌 2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장인들이 등장할지 기대된다.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202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