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나라와 민족의 사회복지를 위해 소신 있게 외길을 걸어간 인물이
있습니다. 고(故) 김덕준 교수입니다. 그는 1953년 한국 대학 최초로 사회사업학과를 개설하고,
1957년에는 한국사회사업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한국 사회복지계의 선구자로 헌신한
김덕준 교수의 열정 덕분에 대한민국 사회사업과 사회복지가 초석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사회복지교육의 개척자 김덕준 생애에 관한 연구」, 코람데오 출판사
*사진 및 자료 제공: 「사회복지교육의 개척자 김덕준 생애에 관한 연구」, 코람데오 출판사
한국의 가가와가 되기로 결심한 김덕준 교수
1950년대 우리나라는 6·25전쟁이라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사업가의 역할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사회복지 분야는 아직 불모지였고,
사회사업가 같은 전문가를 양성할 환경도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에
사회사업가 양성을 위한 사회사업학과가 개설되었고, 그 과정에서 김덕준 교수가 큰 공헌을 했습니다.
김덕준 교수는 우리나라 사회사업과 사회복지 교육 분야의 선구자입니다. 1919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그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이웃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준 조부모만큼 김덕준 교수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는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가 있습니다. 가가와는 빈민 구제 사업, 노동조합·농민조합·생활협동조합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문학가이자 목사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노벨 문학상과 노벨 평화상
후보로 각각 두 차례씩 추천될 만큼 일본에서는 간디, 슈바이처와 더불어 ‘성인’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가가와는 13세 때 폐병을 심하게 앓아 고별식을 두 번이나 치를 정도로 병약했습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하겠다”라고 다짐하며 고베 신카와에서 빈민 구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무료
숙박소 운영, 환자 보호, 의료 지원, 무료 장례 지원, 생활비 지원, 아동 보호, 직업 소개, 재봉 야학교 운영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김덕준 교수는 경성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고보) 재학 시절 가가와의 저서를 접하고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한국의 가가와’가 되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품고 사회사업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습니다.
훗날 그 시절을 회고하며 당시 결심이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 중앙신학교 신분증
▲김덕준 교수의 자필 메모 중 ‘사회사업의 독자성’(1955)
▲중앙신학교 신분증
▲김덕준 교수의 자필 메모 중 ‘사회사업의 독자성’(1955)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사회사업 교육
1938년 경성고보를 졸업한 김덕준 교수는 사회사업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일본 교토로 유학을
떠나 도시샤대학교 신학부 예과에 입학했습니다. 김덕준 교수는 여기서 사회사업학을 전공했습니다.
도시샤대학교 신학부 커리큘럼에는 사회학, 사회문제, 협동조합 등의 과목이 포함되어 있어 그는
사회사업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김덕준 교수는 3년간 도쿄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귀국했습니다. 이후 모교인
경성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서울 YMCA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이호빈 목사를 만났습니다.
중앙신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던 이호빈 목사와의 만남은 김덕준 교수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사회사업 교육을 실현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김덕준 교수는 중앙신학원에서 설립한 중앙신학교의 사회사업학과 개설을 준비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가르치는 일을 잠시 멈춰야 했지만,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사회사업가 양성은 더욱
시급해졌고, 김덕준 교수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 피란지 부산에 마련된 분교에서
그는 문교부로부터 사회사업학과 개설 인가를 받아냈고, 제1회 사회사업학과 신입생을 모집했습니다.
▲ 1960년대 강남대 교문
▲사회사업학과 동기대학 개최
▲ 1963년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졸업식 사진
▲1960년대 강남대 교문
▲사회사업학과 동기대학 개최
▲ 1963년 강남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졸업식 사진
한국 사회사업계에 수많은 전문가를 배출하다
김덕준 교수는 중앙신학교 사회사업학과를 대학의 독립학과로 발전시켰으며, 미국 대학의 사회사업학과
커리큘럼을 도입해 학생들에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고자 힘썼습니다. 재학생들은 외국
원조 기관과 국내 사회사업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를 위해 영어 문서 작성과
회화 능력을 익혔습니다.
김덕준 교수의 노력으로 양성된 사회사업 전문가들은 외국의 지원 물자를 단순 구호품이 아닌 자립
지원 자원으로 활용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 초기 중앙신학교 사회사업학과를 통해 배출된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사회사업계에서 활약했습니다.
▲ 강남대학교 설립자 이호빈 목사와 김덕준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
▲ 세브란스의전 시절 해수욕장 의료 봉사 모습(오른쪽 첫 번째)
이웃 사랑 실천이 곧 사회사업
김덕준 교수는 사랑을 ‘세로’와 ‘가로’로 이루어진 ‘집’에 비유했습니다. 세로 집은 가족 중심 사랑을
의미하며, 즉 이웃을 향한 가로 사랑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진정한 사회복지 실천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바로 사회사업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김덕준 교수의 생애와 업적을 이야기할 때 그의 신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세로와 가로로 연결된
사랑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설명하며, 십자가를 단순한 형틀이 아닌 사랑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평생을 대한민국 사회복지 교육 발전에 바친 그의 삶은 곧 희생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실천 과정이었습니다. 김덕준 교수는 자기 삶을 통해 진정한 사회복지 실천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