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백은하 여행 칼럼니스트
글·사진 백은하 여행 칼럼니스트
함백산 만항재(晩項)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 혈동, 영월군 상동읍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고갯길이다. 해발고도 1,330m까지 닿는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로, 탄광에서 석탄을 나르기 위한 차량이 오가던 영월의
운탄고도(運炭高道)와도 연결되어 있다.
고려 말, 경기도 광덕산 기슭 두문동에 살며 고려에 충절을 지킨 고려 유신 중 살아남은 이들이
이곳에 이주해 살았다. 이들은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가장 높은 곳인 만항에서 소원을
빌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망향’이라 불렸고, 후에 ‘만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주차가 가능한 만항재 쉼터 주변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야생화 군락지 ‘천상의 화원’이 있다.
이곳에는 ‘야생화 숲길’이 조성되어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전나무가 빼곡한 하늘숲공원은 겨울이 되면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눈꽃 아래에 자리 잡은 형형색색의 벤치들도 포토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해 편안하게 눈꽃 풍경을 즐기고 싶다면, 고원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여유롭게 감상하는 것이 좋다. 만약 겨울의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호흡하고 싶다면,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까지의 산행을 추천한다. 약 한 시간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어 비교적 부담 없이 겨울 산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만항재에서 한겨울 정취를 만끽한 후 정암사(淨巖寺)에 들러 마음의 휴식을 취해 본다.
정암사는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어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알려져 있다. 정암사라는 이름에는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는 당나라 유학 중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 염주 등을 받아 귀국한 후, 전국 각지에 이를 나누어 모셨다. 그중
한 곳이 석남원(石南院), 즉 지금의 정암사라고 전해진다.
이 창건 설화 외에 정암사에 대해 전해지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정암사의 상징인
‘수마노탑(水瑪瑙塔)’이 고려시대 양식의 모전석탑(模塼石塔)*인 것으로 보아 신라 후기나 고려시대에는
사찰의 원형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정암사 극락교를 건너 적멸보궁 뒤편 산길을 따라 약 10분간 계단을 오르면 산비탈 절벽 위 돌로 쌓은
축대에 진신사리를 모신 수마노탑을 만날 수 있다. 수마노탑은 ‘용궁에서 나온 푸른 마노석의 불탑’이라는
뜻으로, 『정암사 사적기』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그의 도력에
감화해 마노석 조각을 주며 탑 건립을 부탁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노’는 석영에 속하는 보석으로,
실제 탑의 재질은 마노석이 아닌, 기단부는 화강암, 탑신은 백운암으로 되어 있다.
정암사의 고즈넉한 풍경 속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는 수마노탑을 보노라면 마음의 티끌마저 사라지는
기분이다.
*모전석탑: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건조한 탑
정암사를 나와 ‘삼탄아트마인’으로 향한다. 삼탄아트마인은 1964년부터 2001년까지 38년간 운영되다
폐광된 삼척탄좌 시설을 창조적 문화예술 단지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탄광 현장과 기계, 광부들의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재활용해 산업 문화유산 공간으로 조성했으며 체험시설, 전시관, 공연시설,
레스토랑 등을 갖춘 국내 첫 예술 광산이다. 삼탄아트마인이라는 이름은 ‘삼척탄좌+art(예술)+mine(광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삼탄아트마인의 본관인 삼탄아트센터는 과거 삼척탄좌 사무실, 광원들의 공동 샤워실, 수직갱 운전실이
있던 공간으로 역사박물관, 아트레지던스룸, 현대미술관(CAM) 그리고 기획 전시관인 마인갤러리로
탈바꿈했다.
레일바이뮤지엄은 삼척탄좌에서 캐낸 석탄을 집합하던 주요 시설이자 광부들이 지하 600m 탄광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던 산업용 엘리베이터였다. 한 번에 400명의 작업자를 실어 나르며 연간 50만 톤의
암석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국내 최대 권양(捲揚)** 능력을 자랑했다. 건물 내부는 당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옛 삼척탄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야외 공원에는 중앙압축기실로 쓰이던 원시미술박물관, 탄광의 기계 제작 공장을 개조한 레스토랑 823L,
수평갱을 이용한 동굴 와이너리, 기억의 정원 등이 있다. 이 중 원시미술박물관은 세계 150개국 이상에서
수집한 수십만 점의 원시미술 작품이 전시된 국내 최고 원시미술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연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정선은 추운 겨울일수록 더 빛나는 듯하다. 올겨울, 아름다운 겨울 왕국으로
따뜻하게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권양: 줄을 감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