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힘을 제대로 발휘한다면,
아이들이 자기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대학교 수학과
박형주 석좌교수
“음악은 감성의 수학이고, 수학은 이성의 음악이다.” 영국 수학자 제임스 조지프 실베스터(James Joseph Sylvester)의 말이다. 이 문장에서 ‘음악’의 자리는 어떤 단어든 대체할 수 있다. 예술은 감성의 수학이고, 수학은 이성의 예술이다. 삶은 감성의 수학이고, 수학은 이성의 삶이다. 결국 수학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수학을 멀리하고, 때론 수학과 동떨어진 채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 가운데 사람들에게 수학의 존재 이유와 쓸모를 알리고 한 발 나아가 세상과 수학의 연결 고리를 찾는 ‘이성의 예술가’가 있다. 수학자이자 아주대학교 수학과 석좌교수 박형주 교수다.
글
이성미 /
사진
이용기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의 힘
‘빅데이터 분석 결과 브랜드 평가 1위’, ‘빅데이터 기반 시스템 마련’ 등. 하루에도 몇 번씩 ‘빅데이터’라는 단어를 듣는다. 우리는 빅데이터 속에서 살고 있다. 살면서 만들어내는 ‘숫자’인 빅데이터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예측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즉 복잡다단한 지금의 세상을 수학은 보기 쉽고 알기 쉽게 만들어 준다.
“마케팅이란 고객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시장을 구축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잘 짜인 구성과 카피로 고객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주된 기법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빅데이터를 통한 소비자 분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때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것은 수학의 영역입니다. ‘감정’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도구가 바뀐 셈이죠.”
수학과 예술의 만남은 이미 고대부터 꾸준하게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피타고라스가 있다. 수학자인 그는 음악 속에서 수의 규칙을 찾아내 ‘피타고라스의 음률’을 만들어냈다. 또한 익히 알려진 황금비율 1:1.618은 피보나치 수열과 깊은 연관이 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수학은 그저 유리된 학문에 그치지 않는다. 수학은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세상의 흐름을 읽고 예측하는 시야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수학의 정의를 기계적 연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외다.
그렇다면 수학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박형주 교수의 생각은 19세기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의 그것과 닮았다. 그는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라고 했다. 공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보고 해결 방안을 찾는 데 있다는 것이다.
차이나는 클라스 출연 모습 [출처: 차이나는 클라스 공식 유튜브]
수학은 독서이며 작문, 이야기의 학문입니다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먼저, 수학에 담긴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는 수학 용어의 어원, 탄생 역사 등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대신 풀이에 집중한다. 그러나 각 과정이 어떤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왜 필요한지 설명할 때 수학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흥미’와 ‘학습 동기’도 유발할 수 있다. 무작정 풀이에만 집중하다 보면 수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을 문제 푸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를 푸는 데에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문제와 해결 방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풀이 과정을 서술하며 점검하는 것이다. 박형주 교수는 자신의 저서 「배우고 생각하고 연결하고」에서 “수학은 독서와 작문 과목이 될 수 있다. 수학의 역사성을 ‘난해함의 원흉’이 아니라 ‘생각을 채우는 글쓰기의 보물 창고’로 바꾸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라고 말한다. 정리하면, 수학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선 교육하고 평가하는 방식에서 새로운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
“반복 학습을 통해 문제를 계속 풀어나가는 기술은 정작 사회에 진출했을 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는 복잡한 문제를 원인 분석부터 해결 방안까지 차분히 헤쳐나가는 능력을 요구하죠. 수학을 통해 우리는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평가도 바꿔야 합니다. 답이 아닌 ‘과정’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문제를 꼬아
내는 것으로 변별을 두는 것이 맞느냐’보다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지 평가할 수 있는가’가 논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단번에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채점의 공정성’에 대한 부분이죠.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이 과거에는 어려웠을지 몰라도 인공지능 시대에는 가능합니다. 현재와 같이 선다형 문제를 두되 서술형은 문제 은행 방식을 도입해 인공지능이 채점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답이 틀려도 풀이 과정이 맞으면 점수를 주거나 답이 맞아도 풀이 과정이 틀렸다면 점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의 과정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어른 출연 모습 [출처: 사피앤스 스튜디오 유튜브]
책 속에서 길을 찾은 어린 수학자
박형주 교수 역시 생각하고 말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수학자가 되었다. 보통 수학자 하면 난제를 풀기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박형주 교수의 실험실은 ‘세계’다. 수학자로서 곳곳을 오가며 여행하고,
세계 수학자들과 머리를 맞댄다. 또 아는 것을 설명하며 새로운 것을 습득한다.
“저는 젊은 수학자들에게 ‘학문적 친구를 만들라’라고 조언합니다. 자기 문제에 빠져 스트레스를 받을 게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하며 아이디어를 얻으라는 것이죠. 실제로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풀이 과정을 설명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큰 장애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시선으로 접근했을 때 아무것도 아닌 적도 있었고요. 아마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해 조리 있게 설명하는 훈련을 하다 보면 무엇이든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박형주 교수는 미국 U.C. 버클리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미국 오클랜드대학교 수학과 교수,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포항공과대학교 수학과 주임교수,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소장, 아주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다. 2014년에는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아 한국에서 열린 첫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국제수학연맹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분명 비범한 삶이다. 이것만보면 학창 시절
수학 과목에서 전교 1등을 휩쓸고 일찍이 천재성을 발견해 영재교육을 받은 소위 엄친아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창 시절 박형주
교수의 모습은 우리 상상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는 반복 학습만을 강조하는 교육에 염증을 느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했다. 대신 교육청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 매일 책을 읽었다. 뜻을 새겨가며 자세히 읽는 것을 정독(精讀), 한 방면에 치우쳐 읽는 것을 편독(偏讀)이라
한다면, 그는 빠른 속도로 글을 읽는 속독(速讀)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잡독(雜讀)을 했다. 혹자는 “중요한 시기에 시간 낭비를
한 것 아니냐?”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형주 교수는 “이때 읽은 책이 평생의 원동력이 되었다”라고 회고한다. 다행히 박형주 교수는 도서관에서
진로를 찾았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전기에 길이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마치 영웅처럼 느껴졌고, 그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 우연히 알게 된 프랑스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Évariste Galois)의 수학 이론에 매료되면서
그는 전공을 수학으로 바꿨다. 그러고는 지금껏 박형주 교수는 수학의 아름다움과 쓰임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
배우고 생각하고 연결하고
박형주 교수가 반복 학습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찾은 지 4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 안에는 자기 길을 찾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 박형주 교수는 이것이 늘 안타깝다.
“저는 아이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꼭 맞는 교육을 찾아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교육, 성취도가 높고 고이해도를 가진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영재교육, 보편교육을 따라가기 힘든 아이들을 품는 특수교육이 그것이죠. 보편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 양극단의 아이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문명사에서 천재들이 끼친 영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출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교육이 필요하죠. 공교육을 통해 과학적이고 문학적인 소양을 가르치는 일과 함께 영재교육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양극단의 아이들을 품을 만한 시스템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박형주 교수가 수학의 쓰임을 알게 했다면, 연결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아주대학교 총장을 맡았을 때도 그는 연결지성(connecting minds)을 강조한 바 있다. 연결지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분야를 서로 연결해 난관을 돌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수학을 이해하면서, 문제를 사회현상, 역사 등과 결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는 것이다. 이때 독서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수학 훈련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유 능력을 길러준다면 연결지성을 기를 수 있다. 더불어 여러 분야를 연결해 문제를 해결하는 ‘성공’의 경험은 학생들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진로를 결정할 때마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갈 용기를 얻은 것은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가능성을 믿고 지지해 준 선생님들 덕분이고요. 전국의 교직원 여러분께도 학생이 가진 가능성을 신뢰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고성취자인 영재도,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시야를 확장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럼 아이들의 인생이 바뀌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인재로 자랄 것입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하지만, 결국 변화를 이끄는 것은 사람이다. 수학적 인간이라면 변화를 주도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첫 점을 찍기 위해 박형주 교수는 오늘도 세상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