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용원고, 발명의 중심지로 우뚝 서다
‘궁리’라는 낱말이 있다. 일을 처리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빠르게 정보를 얻을수록, 쉽게 편리를 누릴수록, 우리는 그 단어와 멀어져간다. 넓게 사고할 필요도, 깊이 사색할 이유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명은 바로 그 궁리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결과물이다.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를 꼼꼼히 짚어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찬찬히 고민해 보는 과정. 발명이 과학과 공학을 넘어 철학이자 사회학이자 인문학인 이유다.
“제가 지도하는 발명 동아리 이름이 STEAM이에요. 스팀 교육(과학(S), 기술(T), 공학(E), 예술(A), 수학(M) 분야를 융합한 통합 교육)에서 영감을 얻어 작명했어요. 다섯 가지 학문 외에도 다양한 학문을 발명에 활용해요. 융합적 사고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그게 제가 생각하는 발명입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15명 안팎의 학생이 활약 중인 STEAM은 수상 경력이 매우 화려한 동아리다. 2020년부터 3년 연속 ‘경남발명우수학교’로 선정됐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는 전국학생 과학발명품 경진대회에서 2년 연속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올해는 또 하나의 큰 대회인 대한민국 학생발명 전시회에서 수상이 확정된 상태이고, 곧 심사에 들어갈 전국학생 과학발명품 경진대회에서도 3년 연속 수상을 기대하고 있다. 100여 명의 학생이 80건 남짓의 발명품으로 각종 상을 받아온 STEAM, 현재 소속 학생들의 성취감과 자신감으로 얻어진 미소가 환하다.
“이 작품은 지난해 전국학생 과학발명품 경진대회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상을 받은 ‘반려동물 긴급 하임리히 및 심폐소생 장치’예요. 반려동물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편리하게 심폐소생술, 하임리히 등의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또 하나의 가족인 반려동물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깊은 공감에서 나오는 좋은 발명
진해용원고등학교가 발명우수학교로 거듭난 배경을 그는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과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 덕분이라 생각한다. 이 학교는 전국에서 단 세 곳만 선정된 발명 교육 거점학교 중 한 곳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선 입시와 관련 없는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 부분을 믿어주고 도와주는 ‘환경’이 조성돼 있어 든든하다.
“그중 으뜸은 2020년에 지어진 이곳 ‘무한상상실’이에요. 공간과 장비가 마련되면서 글자 그대로 무한한 상상이 가능해졌어요.”
그는 단지 촉진자이자 보조자일 뿐 STEAM의 발명품은 모두 학생들 스스로 제작한다. 대신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다. 첫 단계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각자 생각하는 사회적 문제를 웹 스프레드 시트로 공유하면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거나 서로의 생각을 보완해 나간다.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 사고가 크게 증진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정한 사회적 문제는 다양한 사고기법을 활용해 아이디어로 창출된다. 여러 학문을 활용해 가며 여럿이 함께 궁리하게 하는 것. 그가 발명을 교육하는 방식이다.
“좋은 발명은 ‘깊은 공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상황이나 처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눈 밝게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발명품은 ‘혼자서도 적용할 수 있는 휠체어 바퀴 탈출 장치’예요.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휠체어를
사용하다 하수구 같은 틈새에 휠체어 바퀴가 끼이는 걸 방지하고, 혹여 빠졌더라도 휠체어의 앞바퀴를 스스로 빼냄으로써 2차 사고를 방지하도록 한 발명품입니다. 학생들이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데도 타인의 아픔을 공감했다는 게 참 기특해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이유
STEAM 동아리에선 발명 교육 외에 지식재산권 교육도 병행한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만으로는 발명을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고안되면 선행기술조사(특허 조회)를 통해 이미 나와 있는 기술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기존에 존재하는 기술이라면 어떻게 변형할지 고민한 뒤 직접 도면을 그리고 손수 제작을 진행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실패가 예상되는 길이라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완성해 보는 경험, 그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나날이 조금씩 성장해 간다.
발명 동아리 STEAM의 활동 모습
“1학년 때 발명을 시작한 학생이 3학년이 되면 아이디어의 수준이나 도면 그리는 기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포트폴리오에 고스란히 드러나요. 한 번 열린 사고는 크게 확장되는 속성이 있어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이 매우 큽니다.”
그도 크게 발전해 왔다.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기보다 함께 길을 찾아가는 것을 더 선호하는 그는 발명 교육을 통해 관련 지식을 꾸준히 습득해 왔다. 이 학교로 발령을 받은 2018년 ‘지식재산 일반’이라는 과목이 도입됐고, 그 과목 교육과 발명 동아리 지도를 맡으면서 관련 공부를 지금껏 해오고 있다. 발명과 지식재산 일반에 대한 이해는 있었지만, 특허 명세서 작성이나 발명의 사업화, 기술 평가 같은 것은 미처 몰랐던 지식이다. 그도 다양한 연수를 꾸준히 받으면서 학생들과 같이 성장하고 있다.
“발명 교육을 해보려는 교사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발명은 항상 미완성 상태예요. 계속 보완해야 합니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문제 해결 과정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결과가 당장 나오지 않더라도 미리 실망하지 말고 묵묵히 해나가시길 바라요.”
2022년 경남고교학점제박람회에 학교 대표로 참석한 STEAM
학생의 성장을 돕는 교사
이 학교가 첫 부임지인 그는 교사 생활 3년 만인 2021년에 전국의 우수 인재 100명에게 주는 ‘대한민국인재상’을 수상했다. 발명 교육이 핵심 공적이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인걸 잘 알기에 오늘도 묵묵히 그 길을 걷고 있다. 문제는 내년에 학교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공립학교로서는 이례적으로 진해용원고등학교에서 6년간 근무한 그는 내년부터 새 학교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발명 교육에 대한 이 학교의 지원이 워낙 전폭적이어서 새로운 곳으로 옮겨 가는 것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즐겁게 받아들이려 한다. 이 학교에서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여기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할 힘이 제게 있을 거라 믿어요. 사실 이런 시설이 없어도 발명 교육은 할 수 있어요. 새로 가게 될 학교에도 지금 같은 ‘문화’가 형성돼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저만의 방식으로 발명 교육을 쭉 해나가고 싶어요.”
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5년 반이 지난 그는 교사로서의 ‘초심’과 지금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처음 교사가 됐을 땐 학생들에게 교과 내용을 잘 전달하고 학생들을 따뜻이 지도하는 교사가 되는 것이 소망이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와보니, 다양한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활동하는 교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을 지켜보며 본래의 소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만의 분야에서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색다른 도전을 하고 싶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그 바람의 결과다. 꿈을 꾸면 변화한다는 것을 그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고 있다.
“존경받는 교사가 되는 게 현재의 꿈이에요. 근데 그 존경은 학생들에게 바라는 바를 교사 스스로 솔선수범할 때 비로소 나오는 것 같아요. ‘도전해라’, ‘혁신해라’ 말로만 하지 않고 저부터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앞장서는 사람이 되길 그는 꿈꾼다. 그의 ‘등’을 보며 걸어갈 학생들이 서로 등을 맞대며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