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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23 Vol.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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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조선 총독에 폭탄을 던지다

백발 청년 강우규 선생


조선시대 평균 수명은 40세 남짓으로 남대문역에 등장한 신임 조선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이의 나이가 65세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실천하는 열정 덕분에 3.1 만세 운동 이후 시들어 가던 독립운동에도 새로운 활력이 돌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돕다가 3.1 만세 운동을 기점으로 직접 운동에 가담하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65세에도 자신의 뜻을 위해 몸을 던진 강우규 지사의 일생, 그 안에 열정과 헌신을 만나보자.

이경훈 화홍고등학교 역사교사

이경훈 역사 교사는 화홍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일 간 역사 갈등과 화해를 연구하면서 「쟁점 한일사」 「마주 보는 한일사」 (공저) 등을 출간했다.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원교사,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수라장이 된 서울역 광장의 환영식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 앞에는 새로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토를 맞이하는 환영식을 위해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있었다. 총독부 관리들과 주조선 외교 사절단, 이완용을 비롯한 조선의 친일 귀족, 일본인 기업가 등도 새 총독을 맞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3·1운동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남대문역을 비롯해 남산의 왜성대 총독부(당시에는 총독부가 남산에 위치. 광화문건물은 1926년 완공), 용산의 총독 관저에 이르는 거리에 군경을 배치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도착 예정 시간보다 두 시간 늦은 오후 5시, 총독 일행을 태운 열차가 남대문역으로 들어왔다. 사이토 신임 총독은 환영 인파의 환대에 답례하고 아내와 함께 대기 중이던 쌍두마차에 올랐다. 한양공원(현재 남산공원)에서는 신임 총독을 환영하는 예포 21발을 쏘았다. 예포 소리가 그치자마자 쌍두마차 근처로 검은 물체가 날아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환영식장은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댕구가 터졌다”라고 외치며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폭탄’이라는 말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폭탄을 가리켜 대포를 의미하는 대완구를 줄여 ‘댕구’라고 불렀다. 마차 주변으로 37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으나 군복을 입고 있던 사이토 총독은 파편이 허리띠에 맞은 덕에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강우규 선생. 9월 17일에 친일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된 선생의 사진이 매일신보 10월 7일 자에 실렸을 때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거사를 일으킨 이가 청년이 아니라 백발이 성성한 65세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40세 남짓이었다. 65세라면 지금 나이로 90세를 전후한 노인에 해당했다.
투탄진정범인(진범) 강우규 선생 체포 관련 기사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촉망받던 한의사에서 민족교육 운동가로 변모하다

강우규 선생은 1855년 평안남도 덕천군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다.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웠고, 친형에게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방 의술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고 있었으나 전통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0세가 되던 1885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한 선생은 그곳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장남인 중건과 함께 잡화점도 경영했는데 수완이 좋아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당시 지역 상인들에게 장사 밑천을 하라고 적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이때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동휘 선생은 신민회 활동의 일환으로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기독교 선교 활동과 함께 학교 설립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강우규 선생은 이동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한 뒤 사재를 들여 영명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교육계몽운동과 민족의식 전파에 앞장서게 되었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운동가의 한길로 나서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강우규 선생은 가족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켰다. 본인도 이듬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향했다. 지린성 랴오허현 일대에 한인 동포를 불러 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했다. 이곳을 선정한 이유는 남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광동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연해주와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신흥동은 러시아와 만주 각지에 산재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기지가 되었다. 강우규 선생도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락을 취하고 광동학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방으로 행상 의료업을 다녔다. 이때 러시아와 만주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도 활발해졌고, 국내 정세도 들을 수 있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해 랴오허현 지부장을 맡다

맡다교육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전개하던 강우규 선생에게 다시 한번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3·1운동이었다. 그는 광동학교 학생과 동포들을 모아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랴오허현 일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했으나 만세 운동만으로는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동휘가 활동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이동휘의 부친 이승교와 김치보,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하 노인동맹단)에 가입해 랴오허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하기로 했다. 노인동맹단은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달리 회원의 가입 연령을 46~70세로 제한했다. 이는 실전에 참여하는 독립운동 청년들을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결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동맹단은 5월 말 이승교를 비롯한 단원을 국내로 파견해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 직접 활동도 전개해 청년들에게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
[출처: 월간 독립기념관]
강우규 선생은 이 같은 독립운동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5월이 지나 3·1운동의 기세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열강은 조선의 독립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 성명회에도 일제의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점점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토록 바라던 독립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위기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사이토 마코토에게 수류탄을 던지다

1919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보신각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돌아온 이승교를 비롯한 노인동맹단원 환영회가 열렸다. 강우규 선생도 국내 정세 파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때 3·1운동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은 새로 부임하는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신흥동으로 돌아온 강우규 선생은 먼저 러시아인을 통해 영국제 수류탄 한 개를 구입했다. 선생은 수류탄을 천으로 감싸 사타구니에 감추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잠입했다. 원산에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최자남을 통해 청년 허형을 소개받았고, 그와 함께 8월 서울로 들어왔다. 허형의 주선으로 안국동 김종호의 집에 머물면서 새 총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사를 위한 준비를 했다.
신문 보도를 통해 신임 총독으로 임명된 사이토 마코토가 9월 2일 남대문역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이후 분위기 전환을 위해 신임 총독의 사진을 신문에 크게 싣고 조선 통치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신임 총독 부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강우규 선생은 8월 28일 남대문역 근처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기고 매일 역 앞에 가서 현장 상황을 조사하면서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거사 당일인 9월 2일 강우규 선생은 허리에 수류탄을 명주 수건으로 단단히 붙잡아 맨 뒤 두루마기를 입고 남대문역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환영 행사를 마치고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을 담아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터진 폭탄은 사이토를 죽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제국주의 일본과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표명하기에 충분했다.
2011년 서울역 광장에 건립된 왈우 강우규 선생 동상
[출처: 두피디아 백과사전]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생각한 열정

비록 거사에 실패했으나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온 강우규 선생은 하늘이 또 한번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허형과 만나 재차 거사를 계획하며 서울에 은신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 경찰은 발칵 뒤집혔다. 신임 총독이 부임하자마자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찰은 당시 현장에서 수상한 노인이 고무공 같은 물건을 던졌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고 서울 시내를 샅샅이 뒤져 무고한 노인들을 죄다 잡아들이기도 했다. 결국 강우규 선생은 거사 16일 만에 체포되었다. 선생을 체포한 것은 친일 경찰 김태석이었다. 선생은 체포 당시 자신 때문에 잡힌무고한 노인들을 방면할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의거를 만천하에 공개하면 순순히 동행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태석은 선생을 강제로 포박해 끌고 갔다.
강우규 선생 판결문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강우규 선생 묘소(국립서울현충원)
[출처: 서울시]
1920년 2월 경성지방법원은 강우규 선생에게 사형을, 최자남에게 징역 3년 형을, 허형에게는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선생은 즉시 항소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지들을 변호하고 의거의 진정한 의미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사이토는 동양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이며 인도주의를 무시하는 사람이므로 죽이려 한 것이오. 검사는 나를 매명한(賣名漢,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일을 저지른 자)이라고 하나 나는 죽어도 매명한이 아니오. 인도 정의와 동양 평화,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자요.”
강우규 선생은 4월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아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5월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 확정 후 복역 중에 자신을 찾아온 아들 중건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중략) 너는 나의 이 유언을 전국의 학교와 교회에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강우규 선생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는 선생의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안장하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은 조선인의 민심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허가하지 않았고, 서대문형무소 공동묘지였던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가매장하도록 했다. 선생의 묘는 1967년 6월 비로소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백발 청년의 의거, 의열투쟁의 효시가 되다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또 다른 방법으로 정립된 의열투쟁의 효시가 되었다. 의열투쟁은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으로 이어지며 조선 독립의 의지와 제국주의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 지배 만행을 알리는 주요 독립운동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강우규 선생이 의거를 결행한 나이는 65세였다. 독립운동 이전의 역사에도, 이후의 역사에도 폭탄 투척 의거는 주로 청장년에 의해 결행되었다. 백발 청년 강우규의 의거는 3·1운동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던 1919년 말 다시 한번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고 조선의 수많은 청년을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강우규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2006년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가 출범했으며, 2011년 9월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을 건립했다. 오늘도 강우규 의사는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날의 거사를 증언하며 식민 지배의 고통과 조국 광복을 위해 힘쓴 사람들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