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은 큰 마당과 사립문이 있었다. 평소에는대부분 안방과 뒷방을 사용했고, 사랑방은 대부분 농작물을 보관하는 용도였다.
인정 많은 어머니는 사랑방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오갈 데 없는 사람이나 물건을 팔러 온 분에게도 사랑방을 내어주곤 하셨다.
많은 분이 그 사랑방을 거쳐 갔는데 언제나 무료였다.
우리 집 마당은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마을 입구에 집이 있었고, 마당이 제법 커서 아이들은 자치기, 팽이치기 등을 실컷 하며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여름이면 들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형제끼리 등목을 해주었다.
흠뻑 땀을 흘린 뒤 찬물을 등에 끼얹고 난 후 수건으로 닦을 때는 특유의 시원함과 개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고추와 호박 몇 개를 통째로 송송 썰어 넣고 끓여주시는 된장찌개는 꿀맛이었다. 어쩌다가 동네 어르신들이 막걸리 한잔이라도 드시고 오래전 흘러간 노래를 부르면 마을 노래자랑으로 이어졌다.
가을걷이 때가 되면 콩과 팥, 고추 등을 말리느라 앞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농작물로 꽉 들어찼다. 씨받이로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옥수수를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성해져 괜히 기분까지 좋았다.
호박, 가지, 토란대 등의 나물을 가을볕에 말려야 색과 맛이 오래 간다며 어머니는 햇볕만 나면 광주리에 담아 마당 한가운데에 내어놓곤 하셨다.
마당에 심어놓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갛게 익은 감을 따서 큰 항아리에 넣은 뒤 우려내면 이튿날 떫은맛은 사라지고 달고 맛있는 감으로 변신한다. 그리고는 추운 겨울 까치를 위해 까치밥은 꼭 남겨 두셨다.
온종일 시끄럽게 뛰노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얘들아,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 내 나이 네 살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어머니,
그렇지만 마음만은 늘 부자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찾아와 담소를 나누거나 윷놀이를 했다. 그중에는 친하게 지냈던 병수 형 어머니도 계셨는데, 몸이 아파 병원에 있는 날이 많으셨다.
어느 추운 겨울, 첫눈이 온 동네를 하얗게 수놓았다.
“원성아”(당시 집에서 나를 부르던 이름)
사립문 쪽에서 힘없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병수 형 어머니셨다. 지병으로 몸은 야윌 대로 야위셨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아휴, 형님 오셨어요.”
그 소리에 아침을 드시다 말고 어머니는 부리나케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병수 형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시다가 우리 집으로 곧장 오셨던 모양이다.
그해 겨울, 총각김치에 보리가 많이 들어간 밥이 전부였지만 어머니는 병수 형 어머니께 사랑방을 내어주고 아침저녁으로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방을 따스하게 해주셨다.
그렇게 따뜻한 정을 나누며 우리는 한겨울을 함께했고, 병수 형 어머니는 병세가 점차 회복되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인정만큼은 넉넉해서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한 날들이었다.
지금은 어머니도, 병수 형 어머니도 저 먼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셨지만, 첫눈이 올 때면 까마득한 세월을 자식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와 지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병수 형님을 사랑과 정성으로 잘 키우신 병수 형 어머니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