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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살되, 네 삶을 살아라!”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인권을 위해 헌신한 교육자 차미리사 선생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동물권, 소수자의 인권과 함께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해 높은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와 공감대가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삶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엄혹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도 여성의 권리를 신장해야 함을 주장하고, 여성 교육 확대를 온몸으로 실천했으며,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외치고 현장에서 투쟁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차미리사(1879~1955) 선생이다.

우경윤 이우학교 역사 교사

우경윤 교사는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성남 이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또 교육 불평등 해소, 아동 청소년의 교육 선택지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함께여는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천연균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동양편」, 「교과서를 쓴 인물」 등이 있다.

‘섭섭이’가 아닌 ‘미리사’의 삶을 결심하다

차미리사 선생은 1879년 8월 21일(음력)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아버지 차유호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5남매가 일찍이 죽고 난 후 임신한 부모는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와 달리 딸이 태어나자 ‘섭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시 보통 집 여인들은 의미가 담긴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공문서에 이름을 올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일곱 살이 되던 1895년에 김진옥과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하지만 결혼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하고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찍 사별을 경험한 고모가 오늘날 서울 개신교회인 상동교회로 그를 이끌었다. 신앙생활은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개척하고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불어넣었다. 기독교에서 남성과 평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을 발견하고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우리 민족을 억압하던 신민(臣民) 구조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의 신앙심은 깊었고, 성실했다.
선교사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아 ‘멜리사(Melisa, 美理士)’ 라는 세례명을 얻은 후 서구식 관습에 의해 남편의 성을 따라 ‘김미리사’로 불리다가 1936년에야 본성을 쓴 차미리사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이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1992년 10월 경 현봉학 선생의 모습 미국 유학 시절의 차미리사 선생
[출처: 덕성여대신문]
1973년까지 미국 해병대 기밀문서로 묶여 있었던 흥남철수작전 보고서 양장 차림에 양산을 들고 있는 차미리사 선생의 30대 후반 모습
[출처: 덕성여대신문]

유학 생활을 통해 확고해진 평등과 인권 의식

구한말, 개신교회는 근대 문물을 소개하고 근대적 사고를 하는 사람을 육성하는 교육을 병행했다. 특히 믿음이 깊은 신앙인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고, 차미리사 선생 역시 근대 여성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했다. 노모와 어린 딸을 두고 길을 나서야 하는 아픔이 있었으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과 조선 여성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명이 이별의 슬픔을 뛰어넘게 했다.
1901년 중국에 있는 감리회 소속 학교로 유학을 떠난 그는 영어·중국어·신학 등을 공부하며 미국 유학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4년간의 중국 생활 중 병에 걸려 귀가 어두워지는 장애를 얻었지만, 선교사의 도움으로 선생이 스물일곱이었던 190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도시 패서디나에 있는 한 호텔에서 일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평등, 인권에 대한 깨달음을 준 마거리타 레이크(Marguerrita Lake)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마거리타는 동양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당시, 동양인과 여성, 아이 등 소외된 이들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영어·성경·기술을 가르치는 활동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고국으로 돌아가 온 힘을 다해 여성 인권 신장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차미리사 선생의 신념을 확고히 하는 단초가 되었다.

구국 운동에 앞장선 깨어있는 여성 교육자

조선 여성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소명으로 교육, 계몽, 국권 회복이 필요함을 인식한 차미리사 선생은 이를 하나씩 실천했다.
1905년 미국에서 안창호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 만회를 위해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고, ‘대동교육회’라는 교육 단체를 결성해 고국 학생들의 유학 활동을 지원하고 서적을 출간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07년에는 장경, 방사겸 등 미주 지역 애국지사들과 함께 구국 운동 단체 ‘대동보국회’에 참여해 애국 활동에도 힘을 보탰다. 대동보국회 기관지 「대동공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했고, 1908년에는 미주 지역 최초로 ‘한국부인회’를 꾸리고 회장으로서 한인 노동자를 위한 봉사 활동을 펼쳤으며, 기금을 마련해 고국의 보육원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0년에는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있는 스캐리트 성경학교에 입학해 학업에 몰두할 수 있었고, 졸업 후 귀국한 뒤에는 배화학당에 부임해 사감 겸 교사로 여학생들의 민족 교육에 앞장섰다.
교육에 대한 그의 의지는 학교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방과 후에는 야학을 만들어 지역사회의 부녀자와 여자아이들에게 한글과 근대 의식을 가르쳤다.
차미리사의 흉상  차미리사의 흉상
[출처 : 덕성여대신문]
「매일신보」 1921년 7월 9일 자에 실린 여자강연대 기사와 사진  「매일신보」 1921년 7월 9일 자에 실린 여자강연대 기사와 사진
[출처 : 덕성여대신문]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1920년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해 좀 더 많은 여성이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해 3월 1일에 배화학당 여학생들이 3·1운동 기념 만세운동으로 붙잡히는 사건으로 교사직을 사임하게 되지만, 이에 멈추지 않고 더 큰 행보를 이어갔다.
1921년에는 조선 최초로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찾아가는 강연회’를 기획, 전국을 돌며 노래와 강연으로 희망의 씨앗을 심어나갔다. 한편 조선여자교육회 기관지 「여자시론」을 발간해 여성들의 의식을 고양하는 일에도 몰두했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일깨우다

1922년 차미리사 선생은 조선여자교육회의 명칭을 ‘조선여자협회’로 변경하고 협회 내에 양복과, 상업반 같은 교육과정을 설치함으로써 신문화 수용과 실력 양성을 도모하는 교육 사업을 펼쳤다. 1923년에는 기존 야학교의 명칭을 ‘근화(槿花)학원’으로 바꾸고 주간에 학교를 열어 교육적 역량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이후에도 근화학원 학생들과 함께 음악회, 연극 그리고 개인 강연 등을 개최했고, 이를 통해 마련한 기금으로 다양한 교육과정을 신설하기도 했다.
1925년 근화학원은 가정주부에서 일반 여학교 과정으로 중점 교육 대상을 전환하고 보통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고등과를 설치했다. 그해 8월, 근화학원은 ‘근화여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때 그는 학생들에게 “살되, 네 생명으로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라고 말했다. 이는 조선 여성에게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생각과 삶, 실천을 요구한 것이며, 여성이 완전한 인격체로서 존재함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학교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1934년 재단법인 근화실업학원을 만들어 근화학교를 재단에 귀속시켰다. 여성과 조선이 독립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 같은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근화학교는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교명을 바꿨고 교육과정도 정비해 나갔다. 1936년 근화여자실업학교가 20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던 자리에서 차미리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현명한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아를 잃은 곳에 무슨 참된 아내가 있으며, 진실한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꾀했고,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를 교명으로 사용하는 근화여자실업학교를 용납할 수 없었다. 1938년 차미리사 선생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교명을 ‘덕성’이라 바꾸고 학교를 지키려 노력했으나 계속된 위협 속에 결국 교장 직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여성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에는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설립했는데, 바로 지금의 덕성여자대학교이다.
  염정동 예배당 지하실  염정동 예배당 지하실에서 사무 보는 광경
[출처 : 덕성여대신문]

하나의 조국을 꿈꾸며 영면한 차미리사 선생이 남긴 것

1945년 광복 이후 지식인들은 건국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대표적인 단체가 여운형 선생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차미리사 선생 역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광복 후 한반도는 격동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상황이었다. 그에게 이념보다 중요했던 것은 분열 없는 하나의 조국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무참히 깨져버렸다. 차미리사 선생의 심신은 더욱 약화했고, 결국 1955년 6월 1일 77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을 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다.” 차미리사 선생의 일생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신을 철의 여인으로 만드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이는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을 위한 복지를 실천한 사회운동가이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의 삶이었다. 무엇보다 조선 여성들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메시지로 일깨운여성운동가이면서 교육자였다. “살되, 네 삶을 살아라”라는 차미리사 선생의 외침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정부는 차미리사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2002년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수여 했다. 케이 로고 이미지
조선일보  「조선일보」 1934년 2월 11일 자에 실린 근화여학교 사진. 안국동 교사 앞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 위 사진의 인물이 차미리사 선생
[출처 : 덕성여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