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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더하기

인생 이모작

우리 마음의 고향 동요를 지킵니다.

동요 지킴이 이홍재 회원
교사가 된 후로 그는 평생 오선지 위에서 살았다. 건반을 짚듯 아이들의 아픈 곳을 짚어주고, 음을 이어 멜로디를 만들 듯 아이들에게 길을 내어주며 살았다. 함께 목청껏 부르던 동요는 아이들과 교사를 잇는 끈이 되고, 추억이 되고, 고향이 되어 영원히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렇게 평생 화음 속에서 살았더니 동요가 나이 들지 않듯 그도 만년 청춘이다.

이성미 / 사진 이용기

주인공 사진

동요가 내게로 왔다

“교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장 선생님이 ‘합창부를 지도해보라’라고 하셨어요. 거듭 부탁하시는 데 무심하게 굴 수 없으니 수락했죠.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 선택이 제 운명을 완전히 바꾸리라고는 말이에요.”
이홍재 회원과 음악의 첫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홍재 회원은 1979년 광천 오서초등학교에서부터 2018년 홍성 서부초등학교까지 충남 지역에서 4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했다.
어릴 적부터 셈에 밝았던 그는 수학 교육을 전공하고, 교사가 되자 ‘영재를 육성해야겠다’는 결심을 품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홍재 회원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바로 ‘합창’이었다. 합창이라고는 평생 교회 성가대 경험뿐이던 그에게 합창부 지도 업무가 맡겨진 것이었다. 육상부나 미술부는 개인의 능력이 중요했지만, 합창부는 달랐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음을 찾아주고 나면 수십 명의 화음을 맞춰야 했다. 그렇다고 모른다며 대충 넘기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료 교사들에게 묻고, 다른 학교에 견학도 가고, 교회 합창 세미나도 찾아가 열심히 배웠다.
결심이 서고 아는 것도 생겼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가르치는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50여 명의 학생이 들어갈 연습실이 없어 급식실 책상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연습을 했다. 여름날 뙤약볕 아래에서 연습할 때도 있었다. 같은 노래를 수백 번쯤 불렀을까? 사막에 꽃이 피었다. 처음에는 제 음 찾기도 어려워하던 아이들이 이홍재 회원의 지도 아래 점점 화음을 맞춰갔다. 그의 열정에 학부모들도 물심양면 힘을 보탰다. 합창 대회가 있다고 하면 벼 수매까지 뒤로 미루고 아이들 인솔을 도왔다. 그렇게 이홍재 회원의 노래는 학생, 어른의 마음을 가리지 않고 날아가 앉았다.
우리는 꿈나무 책
이홍재 회원이 지역주민들을 위해 작곡한 ‘시초면민의 노래’ 기념비 이홍재 회원이 지역주민들을 위해 작곡한 ‘시초면민의 노래’ 기념비
하모니카를 부는 주인공

노래는 살아 있어야 한다

학교가 바뀌어도 지도는 계속됐다. 학교를 옮기면 합창부 부터 결성하고 아이들을 모았다. 작곡에도 도전했다. 가만히 있어도 음표가 날아와 귀를 간지럽히는 듯해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홍재 회원이 끄적이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알아서 “쉿!” 하고는 말소리를 줄였다. 그렇게 ‘홍성교육의 노래’, ‘시초면민의 노래’ 등 지역민을 위한 노래와 ‘이웃 속에 내가’, ‘가을밤’, ‘강마을’ 등 동요 약 30곡이 탄생했다.
유치원 원가도 네 곡이나 만들었다. 특히 ‘가을밤’은 전국 새노래큰잔치에서 대상을 받고, ‘별꽃’, ‘모두가 즐거워요’, ‘우리 선생님’, ‘무지개’는 충남교육감배 창작동요제에서 입상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에 힘입어 교사 연수, 도교육청 송년 음악회 등 교육 관련 행사를 다니며 공연도 했다. 교사인 부인과 자녀도 악기를 배워 함께 무대에 섰다.
이홍재 회원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는 데 그치지 않고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많은 아이가 그의 품 안에서 노래를 배우고, 행복을 배웠다.
기타를 들고있는 주인공
하모니카 이미지
노래가 영그는 동안 이홍재 회원도 나이를 먹었다. 교실 안에서 그는 세기가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많은 것이 발달했고, 많은 것이 사라졌다. 대체하면 안 되는 것이 대체되었다. 이홍재 회원에게는 음악 교육의 변화가 가장 크게 느껴진다. 기억 속 풍금 치던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없다. 이홍재 회원에게 그 빈자리는 너무나 쓸쓸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은퇴 이후에도 실음 교육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교실에서 풍금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를 컴퓨터가 대신하죠. 사람은 없고 기계는 있습니다. 저는 음악 교육의 위기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계이름 ‘도’가 있죠?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도는 없습니다. 어떤 악기를 어떤 연주자가 어떤 감정으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수만 가지의 ‘도’가 나와요. 그래서 실음 교육은 귀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아이가 컴퓨터가 들려주는, 감정 없는 한 가지 음악을 듣고 자라요. 거기에는 사람의 감정과 상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안타까워요.”
교장이 되어서도 이홍재 회원은 살아 있는 음악을 가르쳤다. 점심시간이면 뜻이 있는 아이들을 교장실로 불렀다. 그러고는 함께 하모니카를 불었다. 특히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부모와 불화가 있는 아이들을 노래로 품었다. 정확한 음을 내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모니카를 멋들어지게 불라는 것도 아니었다. “속상할 때는 하모니카를 불어라”, “원망스러울 때도 하모니카를 불어라”, “나쁜 길이 보이거든 눈을 질끈 감고 하모니카를 불어라” 하며 기댈 곳을 마련해주려는 것이었다. 점점 실력이 향상되면서 아이들은 자존감을 되찾고,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채기가 났던 마음에 새살이 돋아나면서, 그 위로 새로운 꿈과 희망도 품게 되었다.
기타를 든 주인공

세대를 막론하고 동요는 마음의 고향

동요의 명맥을 잇기 위해 이홍재 회원은 퇴직 후에도 오선지 위를 걸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등을 다니며 하모니카 교실을 운영하고, 보령교육지원청 위탁 교육 ‘찾아가는 예술 교육’의 일환으로 동요 콘서트도 열었다. 지난해에는 보령 지역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과 섬마을 학교를 대상으로 동요 교실을 운영했다. 충남 노인대학에서도 노래 교실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홍재 회원이 이처럼 밤낮으로 열정을 쏟는 이유는 동요가 ‘마음의 고향’이며 귀한 ‘문화유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홍재 회원은 “특히 전시동요(戰時童謠)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장르”라고 힘주어 말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도, 전쟁으로 온 땅이 재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사람들은 동요를 불렀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힘으로 몸을 일으키고, 나라를 일으켰다.
“몸의 고향이 땅에 있다면, 마음의 고향은 동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라면서, 성인이 되어서도 힘들 때면 어릴 적 부르던 노래를 떠올리고 위안을 얻죠. 하지만 동요가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기댈 데가 없으니 다시 일어서기 힘들고, 분노하고, 사람들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동요는 항상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야 해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교사들이, 더 많은 퇴직 교직원들이 동요를 널리 알리는 데 함께 힘써주는 것이다. 풍금이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음악이 존재하듯,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분명 살아갈 방법이 있다”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면 좋겠다. 그날까지 이홍재 회원은 기꺼이 계속 걸을 것이다. 마치 인생 2막의 악보 맨 앞에 도돌이표를 그려놓은 것처럼. 케이 로고 이미지
인생 이모작의 주인공을 찾습니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재능을 기부하며 역동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회원님들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의미 있는 인생 이모작을 실현하고 있는 회원님을 추천해주셔도 좋습니다. 「The-K 매거진」 지면에 담아 많은 회원님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를 전해드리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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