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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좋은 사람 좋은 생각

눈보다 빠른 손으로 펜싱 이미지
열정만큼 뜨거운 사랑으로

前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 최태석 명예교수·서울시펜싱협회장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알레’ 소리가 나자, 검을 든 선수들의 몸이 빠르게 움직인다. 숨 막히는 접전과 역전승, 큰 점수 차로 결국 목에 건 금메달. 이제 한국 펜싱이 세계 최정상에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발전이 있기까지는 척박했던 시절을 앞서 걸었던 선배들의 땀과 노력이 있다. 한국체육대학교 1기로 입학해 지난해까지 교수로서 캠퍼스를 지켜온 최태석 명예교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정라희 / 사진 이용기

운명 같은 펜싱을 만나다

때는 1968년, 중학교 2학년 최태석은 운명처럼 펜싱을 만났다. 도쿄올림픽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2021년과 달리, 당시 펜싱이라는 종목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도 부원을 모집하러 교실을 돌아다니던 선배들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운동하기에는 비교적 작은 체구였던 그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자, 옆자리 친구가 대신 외쳤다. “최태석이 펜싱 하고 싶대요!”
스스로 좋아서 시작했기에 고된 훈련 가운데서도 재미를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내심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엄격한 운동부 기강을 견디며 운동을 계속 할 수 있을지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 선배들이 소년체전 출전을 권유했다. 그리고 목에 건 메달. 그렇게 재능이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과 비교해 무척이나 척박했던 펜싱계의 상황이 종종 브레이크를 걸었다. 고등학교 펜싱부에서 주장으로 활약할 만큼 열심히 운동에 임했지만, 막상 졸업하고 보니 마땅히 갈 만한 대학이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달 동안 방황을 했어요. 운동하면서 만들어놓은 몸이 많이 망가졌지요. 보다 못한 형이 ‘공백 기간에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을 꺼냈는데, 충동적으로 저도 ‘해병대에 지원할까?’ 대답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바로 입대원서를 가지고 왔더라고요. 서류 다 준비했으니 지장만 찍으라고 말입니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지고자 굳게 마음먹고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1974년 7월, 진해에 있던 해병대 훈련소로 향했다.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적성을 찾았다고 여길 무렵, 해병대에도 펜싱팀이 생겼다.
“그때가 1976년이었어요. 해군본부에서 해군과 해병대를 관리하고 있는데, 펜싱팀으로 저보다 뒤늦게 입대한 선배들이 ‘해병대에 최태석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준 겁니다.”
아쉽게 내려놓은 펜싱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할 기회였으나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여전히 펜싱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전국체전 출전을 목표로 팀에 합류했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펜싱 이미지

대한민국 1세대 펜싱 선수,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다

그런데도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해군본부에 개설된 운동부 가운데 한 팀이 대회 후 휴가를 마치고 제때 복귀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운동부가 해체되었고, 그는 다시 원래 소속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당시는 1976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서 국제 수준의 엘리트 선수와 지도자 양성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이와 맞물려 정부에서 체육인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설립된 곳이 한국체육대학교였다.

리우올림픽에서 박상영 선수가 했던 ‘할 수 있다’라는 말은 평소 제가 자주 했던 말이기도 해요. 큰 경기에서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았죠.

“3월에 입학했더니 1기 120명 중에 제대병은 저 한 사람이었습니다. 제대와 동시에 체대 생활을 했으니 대학 시절에도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어요. 그 모습을 좋게 봐주셨는지 당시 학교 교수님들께서 졸업 후에도 학교에 조교로 남으라고 권유하셨습니다.”
1기 입학생으로서 학부 때부터 후배 지도를 해야 했던 그가 교육자의 길로 접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조교와 전임강사를 거쳐 교수로 임용된 때가 1988년. 이후 그는 한국체육대학교 펜싱부의 기반을 다지면서 선수 육성에 주력했다. 2000 시드니올림픽에서 개교 이래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딴 이상기 선수를 비롯해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원우영, 신아람, 남현희, 박상영 등 세계 최정상 선수들이 한국체육대학교를 거쳐갔다. 올해 열린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에 금메달을 안겨준 김정환 선수 역시 한국체육대학교 출신이다. 한 페이지가 넘을 만큼 많은 선수의 이름을 떠올리는 그에게서, 제자를 향한 마음이 느껴졌다.

열정 넘치는 호랑이 선생님의 진심

해병대에서 전역하자마자 체대생으로, 그리고 조교를 거쳐 교수까지. 군기를 풀 새도 없이 평생 훈련하듯 살았다. 자연히 교육 방식도 엄격한 면이 있었다. 체육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단체로 이루어지는 훈련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기강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앞섰다.
학생들이 혈기왕성한 시기에 혹시라도 다른 일로 선수 생활을 접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캠퍼스 밖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달려가 학생들을 챙겼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학생도 있었다. 젊은 선수들이 혈기에 혹 엇나갈까 혼내기도 했다. 1990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이자,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도쿄올림픽 여자 에페 코치 겸 펜싱 한국팀 총감독을 맡기도 했던 장태석 울산시청 감독은 지금도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다.
주인공 사진 펜싱 제자 사진
그에게도 장태석 감독은 애틋한 제자다.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니 절로 가르치는 보람을 느꼈다. 선수들의 기량이 올라갈 수 있도록 훈련 환경을 개선하고, 같이 뛰고 땀 흘리며 진심을 표현하려고 했다. 실전에 필요한 수업을 하기에 수시로 시범을 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펜싱 선수들은 손도 쓰지만, 다리의 움직임도 매우 중요하다. 수십 년 같은 부위를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니 직업병과도 같은 무릎 부상을 얻었다. 그런데도 넘치는 열정이 그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그의 다리는 학교를 넘어 외부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학생들의 권익과 미래와 연관된 일이라면 몸소 뛰어다니며 해결사로 나섰다. 부상으로 재활을 마친 박상영 선수가 다시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든 이도 그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박상영 선수가 출전한 리우올림픽 결승전에는 자신이 더 긴장해 중간에 TV를 껐다 켜기도 했다. 당시 박 선수가 읊조렸던 ‘할 수 있다’라는 말은 평소 그도 자주 했던 말이었다. 체격에서 앞서가는 유럽 선수들과 실력으로 대결해야 하는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그의 열정은 대한민국의 펜싱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역량 있는 선수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주인공 사진 2 펜싱 대회 사진

늘 주변을 돕는 따뜻한 가슴, 끝없는 펜싱 사랑

항상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그는 사실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젊은 날, 해외출장길에 접한 유니세프 후원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고,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홀몸노인과는 4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가며 가족처럼 마음을 나누며 지냈다. 한국전쟁으로 고향에 영영 가지 못한 어르신의 외로움이 얼마나 사무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들 같은 마음으로 어르신의 집을 찾고는 했다.
“어르신께서 백 세를 넘겨 장수하셨지만, 함께 그분의 고향에 방문하자는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배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에게 손을 내밀고, 안타까운 사정의 이웃에게도 마음을 나누는 그의 진심이 펜싱계에서도 지속해서 후배들의 지지를 이끄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2020년에 정년을 맞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퇴임한 그는 6년 전부터 맡아온 서울시펜싱협회장 일에 더욱더 집중하고 있다. 시대 변화와 함께 국내 펜싱계를 쇄신하겠다는 다짐을 서울시펜싱협회에서부터 실행에 옮기겠다는 것. 당장 올해 전국체전 출전 선수 선발 방법부터 쇄신할 계획이다. 이처럼 평생 펜싱과 함께했음에도 여전히 그의 앞에는 때마다 새로운 과제가 쏟아진다. 이는 어쩌면 1세대가 짊어져야 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 채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하나하나 직접 겪으며 명예와 오욕도 함께 지는 것. 그렇게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끝없이 펜싱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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