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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민족의 정기를 지키는 힘은 ‘우리말과 글’

한글 교육에 헌신한 정태진 선생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길만이 한민족을 갱생하는 지름길이다.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아! 8·15 해방의 기쁨!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울려 나오는 우리 어린이의 ‘가갸 거겨’ 소리! 이것이 곧 우리 민족이 다시 살았다는 기쁨의 우렁찬 외침이 아니고 무엇이냐? (중략) 동포여! 우리가 뭉치어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킬 때가 온 것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혼을 영원히 지키어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깨끗하게 전하여 줄 우리 보물을 저 강도 왜적에게 다시금 백주(白晝)에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지 말자!”

- 정태진 선생의 글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중에서 -

김형목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김형목 연구이사는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석사, 문학박사(한국근대사 전공) 학위를 취득했다.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여성 독립운동가 열전」, 「최용신 평전」, 「공주 독립운동사」 등이 있다.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주의를 마음에 품다

정태진은 1903년 7월 25일 현 경기도 파주시 금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증득이었으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태진으로 바꿨다. 호는 과묵한 돌부처를 뜻하는 석인(石人), 본관은 나주이다.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고교, 현재 경기중·고등학교)에 합격한 후 재학중이던 시절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이 자행됐다. 일본인 교사는 불성실한 태도로 우리나라 학생들을 차별·멸시했고, 그 정도는 점차 심해져갔다. 정태진은 거리에 나가 3·1 운동에 동참하며 식민지배에 저항했고 이때부터 그의 항일 민족주의 역사관이 시작됐다.
경성고교를 중퇴한 후, 1921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당시 동기인 정인승을 만나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공감대로 깊은 우정을 맺었다. 아울러 국학자이며 실천적 민족주의자인 정인보 선생의 영향도 받게 된다. 정인보 선생(1893-1950)은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얼’을 강조한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언론인·정치인이었다.

미국에 우리나라의 실상과 유구한 역사를 알리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에는 함흥에 있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영생여고)의 영어와 조선어 담당 교사로 부임했다.
이곳에 재직한 3년 동안 그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전력을 다했으나,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를 생각하며 학생들의 앞날과 민족의 장래에 대한 걱정은 여전했다. 학교가 기틀을 갖춰가면서 안정을 찾아갈 때쯤 그는 갑자기 사표를 냈다.
연희전문학교 빌링스 교수로부터 재차 미국 유학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조선 민족이 하루하루 우매에 빠져들어 가고 있으니 너만이라도 하루빨리 선진국에 가서 많은 것을 배워 돌아와야 한다. 앞으로 조선에는 더 높은 정신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1927년 5월, 그는 유학을 목적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미국 오하이오주의 우스터 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유학길에 오른후 1930년 6월에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에 북미 유학생총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와 유대감 형성에도 앞장섰다. 미국에서도 ‘일화배척 문제 원탁회의’에 참여하는 등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에서는 동양 문화를 연구하는 도서관을 건립했는데 한국의 유학생들은 총장과의 협상을 통해 조선도서관 설립을 허가받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재미조선문화회’를 조직하고 미국 주류사회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며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하는 활동도 했다. 창립총회에서 정태진은 김도연·윤병구·노재명 등과 함께 이사진에 선출됐다. 창립취지문에서 그는 4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장구한 역사와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민족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1933년 정태진 선생의 귀국 기사 이미지 1933년 4월 1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정태진 선생의 귀국 기사

‘미국에서 교육 전공하고 귀국, 형설 6년 금의환향했다’고 쓰여있다.

- 「월간 조선」 2018년 10월 기사 수록 -

우리말, 한글의 표준화를 위한 진심 어린 노력

유학 생활을 마치고 정태진은 영생여고에 돌아와 교무주임에 부임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우리말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인의 정감을 담은 방언에 관한 조사와 연구는 특히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는 교육자로서 일제의 악랄한 탄압 속에서도 수업 중 틈틈이 학생들에게 세계정세와 일본의 장래, 우리 민족의 우수성 등을 설명해주곤 했다. 제자인 소설가 임옥인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명시를 풍성하게 소개하여 민족문화 의식을 심는 데 애쓰셨다. 일본말 사용을 강요하고 우리말 교육이 맥을 못 추기 시작했을 때이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통하여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국문학의 정수를 접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 사진 이미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겪은 조선어학회 회원들. 뒷줄 왼쪽 네 번째가 정태진 선생. (1946년 촬영)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일본어 사용을 본격적으로 강요했다. 이듬해 3월부터는 「조선교육령」을 개정·반포해 일선 학교의 각 학급에서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는 동시에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교사로서 심한 민족적 모멸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정태진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전임위원인 정인승의 제안으로 사전 편찬에 관여하게 된다. 1941년 5월부터는 학교를 사직하고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오랜 숙원 사업인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사전 편찬 사업은 3·1 운동 이후 민족의식 고양에 따라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주시경의 제자인 장지영·권덕규·이병기·김윤경 등에 의해 조선어학회가 조직돼 사전 편찬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들과 각계 인사들은 “조선 고유 문화의 쇠퇴와 민족정신이 통일되지 않는 것은 조선어문의 난립과 불통일에서 기인했다”고 인식했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는 전국의 다양한 어휘를 수집하고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정리, 외래어 표기법을 반영한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한글 연구의 성과를 보급하고 한글을 알려주기 위한 일반인 대상의 한글강습회도 운영했다. 공식 기관지인 『한글』 창간은 본격적인 어문 민족운동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어문 민족운동은 1933년 한글날을 맞이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이어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을 제정하는 결실을 보았다. 그 활동의 중심에는 사전 편찬 사업에 전임위원으로 참여한 정태진의 헌신적인 노력이 담겨 있었다.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다

1942년 9월 5일 아침에 함경남도 흥원경찰서 형사들이 정태진의 집에 들이닥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해 조선 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이 시작된 것이다. 일제 경찰은 홍원의 전진역 대합실에서 일본 유학생 박병업을 불심검문해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의 집을 수색하다가 조카이자 영생여고 학생인 박영희 방에서 일기장을 발견했는데, 이 일기장에 ‘국어(일본어)를 한 마디 썼다가 선생님께 꾸지람을 받았다’는 문구를 근거로 사건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박영희를 일주일 동안 홍원경찰서로 불러 심문하면서 다른 친구들도 차례로 심문했다. 여학생들의 사상을 의심하다가 이러한 항일 의식을 전파한 교사인 정태진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온갖 악형과 고초를 겪게 되고 이후 조사를 통해 일제는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극로·정인승·이윤재·한징·이중화·김윤경·최현배·이희승·장지영·권승욱·이석린 11명, 이어 이우식·정열모·이강래·이병기·김법린·이인·안재홍 등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후원 회원 전원이 체포됐다.
홍원경찰서와 함경남도 경찰부에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했다. 홍원경찰서에서 1년여 동안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한 뒤 정태진은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함흥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만기로 출옥했다. 수형 생활 중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으며 아내도 몸져누웠다.

우리말 『큰사전』 편찬에 헌신한 일생

어둠의 시기는 지나 1945년 해방이 됐다. 이후 조선어학회는 정태진을 비롯해 살아남은 회원들의 노력으로 재건됐고 우리말 『큰사전』 편찬은 다시 시작됐다. 정태진은 이후 연세대, 중앙대, 홍익대, 동국대 등에서 강의하는 한편 조선어학회에서 6개월 과정으로 설립한 세종 중등 국어교사양성소 등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그는 미 군정으로부터 고위 직책을 제의받았으나 고사하고, 오직 우리 말과 글의 정리·연구에 정진했던 학자 중의 학자였다. 또한,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전용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한글이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우리만의 글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자 안 쓰기 문제』 『중등 국어독본』 『고어독본』 시가집인 『아름다운 강산』 등의 다양한 한글 관련 서적들을 출판하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데 역할을 다했다.
한편 재건된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1947년 한글날 발행된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제1-2권 편찬을 주도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영생여고 재직 시절부터 모아온 자료를 토대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서 표준어 사정위원 및 ‘표준말’ 강의를 하던 김병제와 『조선고어방언사전』도 펴냈다.
우리말 큰사전 6권 이미지 우리말 『큰사전』 6권 (1947~1957)의 모습
우리말 큰사전 원고 이미지 우리말 『큰사전』 원고 _ 독립기념관(왼쪽) 및 우리말 『큰사전』 _ 한글학회 소장(오른쪽)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파주로 피신했다가 1·4 후퇴 때에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리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위해 조선어학회 회원인 유제한과 같이 상경했다. 「서울신문」사에서 원고를 마무리해, 표제어가 164,125개에 달하고 200자 원고지 25,600장에 달하는, 우리말 『큰사전』 네 번째 책의 골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1952년 11월 2일 고향인 파주로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우리말 『큰사전』을 완간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정태진 선생이 간절히 바라던 우리말 『큰사전』은 그가 세상을 떠난 5년 뒤인 1957년 10월 9일에 완간됐다.
정부는 정태진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97년 1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듬해에는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0년 파주시는 선생의 생가터에 정태진 기념관을 건립하고 이듬해 12월에 광탄면 영장리로 이장한 묘소를 파주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했다. 케이 로고 이미지